국민건강보험공단 내부 수사의뢰서가 외부로 유출됐다는 의혹을 수사해온 경찰이 문서 작성자와 검토자, 결재권자의 실명까지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를 제출받고도 기존 수사중지 결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27일 의료·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의 A병원은 2023년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행정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작성된 수사의뢰서가 외부로 유출됐다며 원주경찰서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문제의 수사의뢰서는 이후 한 지상파 방송사와 시민단체 등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방송사는 2024년 11월 26일 A병원과 관련한 보도를 내보냈다. 당시 방송 화면에 등장한 서류에는 건보공단이 작성한 수사의뢰서에 기재된 금액 등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A병원 측은 해당 보도와 관련해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소송 과정에서 방송사가 법원에 제출한 자료를 확인한 결과 일부 이름을 익명 처리한 것을 제외하면 건보공단의 수사의뢰서와 내용이 사실상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4월 해당 민사소송 과정에서 방송사에 반론보도 등을 권고하는 화해권고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단체를 통해서도 수사의뢰서 내용이 외부로 전달된 정황이 드러났다. 이 단체는 2024년 7월 서울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건보공단 수사의뢰서 내용이 담긴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후 별도의 민사소송 과정에서 시민단체 관계자는 해당 수사의뢰서를 첫 기자회견 전에 내부고발자로부터 전달받았으며, 건보공단 직원의 제보가 있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A병원 측은 수사의뢰서에 포함된 내용이 건보공단의 행정조사 과정에서 취득한 내부 정보라는 점에서 외부 유출이 국민건강보험법상 정보 보호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보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관할 원주경찰서는 수사에 착수한 지 약 4개월 만인 지난해 10월 수사를 중지했다. 수사의뢰서에 접근할 수 있는 인원과 관련 PC가 각각 100여 대에 달해 피의자를 특정하기 어렵고, 강제수사를 진행하기에도 대상이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이유에서다.
문제는 이후 민사소송 과정에서 경찰이 당초 확보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적 단서가 나왔다는 점이다.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에 따라 건보공단이 지난 4월 법원에 제출한 자료에는 기존 경찰 수사 과정에서 제출된 자료와 달리 수사의뢰서 작성자와 검토자, 결재권자의 실명이 기재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A병원 측은 이를 근거로 지난 4월 원주경찰서에 재수사를 촉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의견서에는 수사의뢰서 작성·검토·결재 과정에 관여한 과장·팀장·부장급 관계자들의 실명뿐 아니라 민사소송 과정에서 시민단체 측에 자료를 전달한 것으로 지목된 건보공단 직원의 실명도 포함됐다는 게 병원 측 설명이다.
A병원 측은 경찰이 수사의뢰서 작성 및 결재 과정과 문서 접근 기록 등을 함께 확인한다면 유출 경로를 상당 부분 좁힐 수 있다는 입장이다. 고발인 측은 “경찰이 수사의뢰서 작성과 결재 과정, 문서 접근 기록 등을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했다면 유출 경로를 상당 부분 좁힐 수 있었을 것”이라며 “새로운 자료를 제출한 뒤 어떤 증거를 추가로 제출해야 수사가 재개되는지 담당 수사관에게 문의했지만 구체적인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법조계 인사들은 수사중지 이후 새로운 단서가 확보됐다면 이를 다시 검토하고 관련자들의 사실관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한 법조인은 “수사중지는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할 때 내려지는 것인데, 이후 작성자와 결재권자, 자료 전달자로 지목된 사람까지 특정할 수 있는 자료가 제출됐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며 “최소한 해당 인물들을 상대로 문서 작성 및 결재 과정과 외부 유출 여부 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법조인은 “고발인이 확보할 수 있는 범위에서 구체적인 단서를 제시했다면 이를 토대로 실제 유출 경로를 확인하는 것은 수사기관의 몫”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이번 사건의 쟁점은 단순히 ‘유출자를 특정할 수 있느냐’에서 ‘새롭게 확보된 자료를 토대로 유출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느냐’로 옮겨간 셈이다. 경찰은 현재까지 재수사와 관련해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향후 재판 과정에서 새로운 단서가 확인될 경우 수사를 재개할 수 있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A병원 측은 현재 건보공단이 행정조사 과정에서 취득한 내부 정보를 언론과 시민단체 등에 유출해 병원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건보공단과 소속 직원 5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는 한편,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국민신문고 민원을 통해 경찰에 재수사를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