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운이 다한 노인들

젊은 날 남자는 거침이 없었다. 1978년 대학에 들어가 화학을 전공했고, 1989년 냉매 수입 대리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같은 해 결혼해 3년 뒤 아들을 얻었다. 서초동에 6억원짜리 집을 샀다. 일찍이 배운 술이 발목을 잡았다. 사업이 기울고 술이 늘면서 가정에 불화가 찾아왔다. 8년 전 아내와 결국 이혼했다. 아들이 자신을 좀비라고 부른다고 그는 말했다.

 

지난 2개월여간 ‘노인과 교도소’를 취재하며 함재원(67·가명)씨를 만났다. 그는 이혼한 이듬해부터 손수레, 맥주 공병 등을 훔치다가 전과 6범이 됐다. 그가 들려준 젊은 날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분명한 건 함씨는 지금 술에게 패배했다는 점이다. 그는 매번 졌다. 딱 반병만 마시겠다면서 소주를 종이컵째 들이켰다. 제정신으로 걸어 고시원을 알아봐야 하고, 돈 벌 궁리를 해야 하는데 그는 끝내 또 한 병을 시켰다. 패배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예림 탐사보도2팀 기자

함씨는 흔히들 말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보였다. 노쇠해서가 아니었다. 함씨의 사지는 아직 멀쩡했다. 우리가 진짜 나약하다고 여기는 쪽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 흐트러진 사람이다. 함씨의 두 눈은 언제나 풀려 있었다. 걸을 때도 갈지자로 비틀거리기 일쑤였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함씨 몫의 책임은 분명히 있다. 아무도 그에게 술에 빠지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남의 물건에 손대라고 등 떠밀지도 않았다. 다만 불운이 겹치면서 남은 선택지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사업이 무너지고, 가난이 덮치고, 가족이 떠나는 동안 그가 쥐었던 패는 한 장씩 사라졌다. 남은 패가 몇 장 없어지자 가장 손쉽게 도피할 수 있는 술을 집어들지 않았을까. 정신이 흐트러져 운이 달아난 것인지, 운이 달아나서 정신이 흐트러진 것인지는 순서를 가리기가 어렵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살라오’로 불렸다.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84일 동안 그는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다. 불행을 나눌 가족도 없었다. 그럼에도 산티아고는 패배하지 않았다. 나약해지지도 않았다. 바다 위에서 그는 싱싱하게 지쳤다.

 

노인이 남달리 강인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마놀린이라는 친절한 이웃집 소년이 있었다. 자신은 운이 다했다는 노인에게 소년은 운이라면 자기가 가져오면 된다고 말했다. 노인에게 운은 쉽게 달아났지만,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 단 한 사람뿐이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늙은 어부는 다시 배를 띄울 것이고, 한 번 더 힘껏 낚싯줄을 던질 것이다. 일하는 사람은 느려도 바쁘다. 제정신이 아닐 수 없다.

 

이달 18일 함씨는 끝내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절도 등 혐의로 열린 재판이었다. 피고인 없는 재판은 2분 만에 끝났다. 소환장은 닿지 않았고 연락을 해봐도 없는 번호로 나왔다. 짧은 시간 함씨의 소재지를 두고 온갖 추정이 이어졌다. 남은 단서는 건강보험 진료 기록뿐이었다. 어떤 날은 정형외과에, 또 어떤 날은 비뇨기과에 갔다. 약국도 여러 번 들렀다. 다만 행정기관 어디에도 함씨의 집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어디선가 마놀린을 만났을까. 아니, 죽기 전에 만날 수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