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한 ‘광인 외교’… 미쳐야만 통하나

닉슨이 소련 상대 쓴 ‘미치광이 전략’
반세기 후 트럼프 방식으로 되살려

북핵 ‘화염과 분노’서 정상회담 돌변
동맹엔 방위비 압박, 中과 무역전쟁
닉슨은 연출… 트럼프, 본색 ‘안갯속’
참모조차 “다음 수 몰랐었다” 증언

미치광이 전략/짐 슈토/이종민 옮김/21세기북스/2만2000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이해하는 핵심 단어는 무엇일까. 거래, 압박, 관세, 동맹 재편 등 여러 표현이 가능하지만, CNN의 수석 국가안보 애널리스트 짐 슈토는 그 중심에 ‘예측 불가능성’을 놓는다. 상대가 미국 대통령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 협상력을 높이는 이른바 ‘미치광이 전략(Madman Strategy)’이다.

 

원제가 ‘The madman theory’인 ‘미치광이 전략’은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을 러시아, 우크라이나, 중국, 북한, 시리아, 이란 등 6개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복기한다. 단순히 트럼프의 발언이나 정책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백악관과 국방부, 정보기관에서 일했던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그의 의사결정이 실제로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파헤친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위)은 1971년 헨리 키신저에게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미치광이’처럼 보이게 하라고 지시했고, 이를 통해 적국의 양보를 끌어내려 했다. 저자는 이를 오늘날 ‘미치광이 전략’의 출발점으로 본다. 생성형 AI 이미지

‘미치광이 전략’의 출발점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1년 닉슨은 헨리 키신저에게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미치광이’처럼 보이게 하라고 지시했다. 핵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내비쳐 소련 등 적국으로부터 양보를 끌어내려는 전략이었다. 상대에게 대통령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인상을 주면, 상대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먼저 물러설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반세기 뒤 트럼프는 이 ‘미치광이 전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활시켰다. 북한을 향해 ‘화염과 분노’를 경고하고 김정은과 ‘핵 단추’의 크기를 겨루다가 불과 얼마 뒤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동맹국에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했고, 중국에는 무역전쟁을 선포했다. 시리아에서는 쿠르드 동맹군을 지원하다 갑작스러운 철군 결정을 내렸다. 이란을 상대로는 핵 합의를 파기하면서도 새로운 합의를 요구했다.

 

책에서 슈토가 주목한 것은 닉슨과 트럼프의 차이다. 닉슨에게 미치광이 이미지는 적국을 상대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연출’에 가까웠다. 반면 트럼프의 경우에는 어디까지가 계산된 행동이고 어디까지가 즉흥적 판단인지 참모들조차 구별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당시 매티스 국방장관 시절 중동 담당 부차관보를 지낸 믹 멀로이는 트럼프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해 “국방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에 이르기까지, 그를 보좌하는 참모들에게조차 그의 의사결정 과정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짐 슈토/이종민 옮김/21세기북스/2만2000원

책의 강점은 이처럼 트럼프를 가까이에서 경험한 인물들의 생생한 증언이다. 조셉 윤 전 대북정책특별대표, 트럼프 탄핵 조사에서 핵심 증언을 한 피오나 힐 전 국가안보회의(NSC) 유럽·러시아 담당 선임국장, 수전 고든 전 국가정보국 수석부국장 등은 대통령의 다음 수를 참모들조차 알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특히 피오나 힐의 증언은 트럼프식 외교가 국제사회에 어떤 혼란을 야기했는지를 압축한다. 협상 상대가 미국 측 협상가에게 “당신이 하는 말을 정말 믿어도 됩니까? 누구를 대표해서 하는 말인가요?”라고 되묻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수전 고든 역시 “우리의 협력국과 적국 그리고 경쟁국들은 우리가 대통령의 다음 수를 모른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외교에서 예측 불가능성은 양날의 칼이다. 상대방에게 불안감을 심어 협상력을 높일 수도 있지만, 동맹국에게까지 불신을 안겨준다면 오히려 미국의 외교적 자산을 갉아먹을 수 있다. 슈토는 바로 이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트럼프의 태도는 대표적인 사례다. 트럼프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유난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도 푸틴에 대한 신뢰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반면 중국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저자는 이를 ‘독재자를 향한 맹목적 호감’과 ‘독재자를 향한 선택적 적대감’이라는 상반된 장으로 배치한다.

 

우리나라 독자에게 흥미로운 부분은 단연 북한이다. 책 중반 ‘화염과 분노’에서 ‘사랑에 빠지다’의 장에서 불과 몇 달 사이에 급변한 북·미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향해 군사적 대응 가능성을 거칠게 경고했다. 한반도에서 실제 군사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미국 국방부에서는 대통령이 실제 군사 옵션을 선택할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했다. 그런데 이후 트럼프는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추진했고,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만나는 파격적인 장면까지 연출했다. 문제는 그 결과다. 정상회담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합의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저자는 트럼프식 정상외교가 거대한 정치적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이 지속 가능한 외교적 성과로 연결됐는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슈토는 미치광이 전략을 비판하면서도 트럼프 외교의 성과도 함께 평가한다. 그는 트럼프의 모든 정책을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슬람국가 격퇴를 가속화했고, 나토 회원국들의 방위비 부담을 높였으며,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정상외교는 분명한 성과로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성과의 지속 가능성이다. 눈앞의 정치적 성과를 얻는 것과 장기적인 국가전략을 구축하는 것은 다르다. 상대국에 대한 압박과 정상 간 담판으로 단기적 양보를 얻어낼 수는 있지만, 동맹과 국제사회가 미국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면 장기적으로 미국의 외교적 영향력은 오히려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트럼프의 미치광이 전략, 즉 예측 불가능성이 정말 전략이 될 수 있는지를 진단한다. 외교에서 상대방이 나의 다음 행동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속적인 전략이 아니라 통치자의 성향 자체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적국뿐 아니라 동맹국과 참모들까지 대통령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외교정책 전체가 불확실성에 빠질 수 있다고 분석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트럼프 2기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보다 행동의 패턴을 읽어야 한다. 책은 그 패턴을 트럼프 1기의 실제 사례와 당시 핵심 인사들의 증언을 추적해 트럼프 2기를 분석하는 데 유용한 분석의 틀과 정보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