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세계사/노먼 네이마크/김상기 옮김/동연/2만9000원
인류의 역사는 문명의 발전과 함께 집단학살의 역사도 반복해 왔다. 고대 로마의 카르타고 파괴에서 몽골제국의 정복,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배, 나치의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홀로도모르, 마오쩌둥의 대기근, 르완다와 다르푸르의 비극까지 시대와 지역, 정치체제는 달랐지만 집단을 적으로 규정하고 인간성을 박탈한 뒤 제거하는 폭력의 패턴은 놀라울 만큼 닮았다.
미국 스탠퍼드대 현대 동유럽사 및 제노사이드 연구자인 노먼 네이마크 교수의 ‘제노사이드 세계사’는 문명의 그늘에 가려진 집단학살의 비극을 3000년에 걸쳐 추적한 기록서다. 고대부터 냉전 이후까지 23개의 대표적인 제노사이드 사례를 살핀다. 저자는 ‘인간이 인간을 지워온’ 집단학살을 단순한 전쟁의 부산물이나 특정 독재자의 광기로 설명하지 않는다. 정치적 권력과 영토, 자원, 이념, 인종적 순수성에 대한 집착, 타자에 대한 공포가 복합적으로 결합하면서 제노사이드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고대 세계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대표적인 사건은 로마의 카르타고 집단학살이다. 지중해 패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오랫동안 대립한 끝에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철저하게 파괴했고 주민 상당수를 살해하거나 노예로 끌고 갔다. 도시의 정치적·사회적 기반도 사실상 사라졌다. 카르타고의 사례는 제노사이드가 반드시 현대적인 의미의 인종 갈등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적대 집단의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규정하고 그 집단의 정치적·사회적 기반을 제거하려는 욕망이 집단적인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명분 뒤에 상대방을 더는 공존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는 순간 폭력의 성격은 달라진다.
유럽의 식민주의는 제노사이드의 또 다른 구조를 보여준다. 콜럼버스의 카리브해 원주민 정복과 학살,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잉카 정복은 군사적 정복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토지와 금, 노동력 등 경제적 이익을 차지하려는 욕망이 원주민에 대한 인종적·문화적 차별과 결합했다.
특히 16세기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 촐룰라에서 벌인 학살은 정복과 집단폭력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도시를 공격해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주민을 살해했다. 원주민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 인식과 영토·부를 차지하려는 욕망이 결합하면서 폭력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20세기에 들어서면 제노사이드는 근대 국가의 관료제와 군사기술을 만나 더욱 조직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다. 나치는 유대인을 독일 사회의 ‘내부 적’으로 규정하고 인종적 순수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낙인찍었다. 이후 차별과 격리, 강제이주, 수용소, 집단살해라는 단계적 폭력이 이어졌다. 중요한 것은 홀로코스트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제도화되고, 선전을 통해 그들을 위험한 존재로 묘사하고, 사회에서 배제한 뒤 마지막 단계에서 물리적으로 제거했다. 유대인뿐 아니라 폴란드인과 집시, 장애인 등도 나치의 인종주의적 폭력 대상이 됐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 정권은 급진적인 유토피아 사회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도시민과 지식인, 종교인, 소수민족 등을 새로운 사회 건설을 방해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사람들은 강제로 농촌으로 이동했고 강제노동과 처형, 굶주림 속에서 대규모로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서도 폭력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존 사회의 구성원을 제거해야 한다는 이념이 폭력을 정당화했다.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유토피아적 명분이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은 것이다.
저자는 제노사이드의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희생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우리’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그들을 향한 혐오와 차별이 용인되기 시작하면 폭력의 문턱은 낮아진다고 설명한다. 역사 속 학살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한 광기가 아니었다. 타자를 적으로 만들고, 인간성을 빼앗고, 차별을 제도화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과정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결과였다는 것. 이 책이 제시하는 가장 현실적인 제노사이드 예방책은 다원성과 포용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이며, 타인의 인간성을 끝까지 인정하는 태도다.
저자는 제노사이드를 기억하는 일이 희생자의 숫자를 세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학살이 시작되기 전 사회에 어떤 말이 퍼졌고, 어떤 차별이 용인됐으며, 특정 집단을 어떻게 인간 이하로 취급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과거의 비극을 통해 오늘 우리 주변의 폭력의 징후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노사이드를 공부하는 진정한 이유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