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의 도살자’, 최악의 보스니아 내전 전범 사망

참혹 대학살이 벌어졌던 보스니아 내전에서 ‘발칸반도의 도살자’로 불렸던 전쟁범죄자 라트코 믈라디치가 27일(현지시간) 84세로 사망했다. 집단학살과 반(反)인도적 범죄, 전쟁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이었다.

 

이날 세르비아 국영 RTS 방송 등에 따르면 믈라디치는 네덜란드 헤이그의 유엔 구금시설 병원에서 숨졌다. 그는 수차례 뇌졸중을 겪는 등 오랫동안 건강이 악화한 상태였다. 가족은 치료를 위해 그를 조기 석방해 세르비아로 보내줄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7일 사망한 보스니아 내전 전범 라트코 믈라디치. 1995년 7월 보스니아계 세르비아군 사령관일 당시 동부 제파 인근에서 헬리콥터로 이동하며 헤드폰을 착용한 모습이다. 당시 크로아티아군의 공세로 세르비아계 난민 최대 2만명이 집을 떠나 보스니아 내륙과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장악 지역 크라이나로 피란해야했다. 연합뉴스

믈라디치는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발발한 보스니아 내전 당시 보스니아계 세르비아군의 최고 군사 지휘관이었다. 1992년 5월 세르비아계 자치정부인 스릅스카공화국군(VRS) 참모총장에 올라 보슈냐크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를 세르비아계가 차지한 지역에서 몰아내기 위한 ‘인종청소’를 지휘했다.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는 그가 보스니아 전역의 인종청소와 사라예보 포위전,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 유엔 요원 인질 억류라는 4개의 공동범죄계획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고 판단했다.

 

그의 이름을 전쟁범죄의 상징으로 만든 것은 1995년 7월 스레브레니차 학살이었다. 당시 스레브레니차는 유엔이 지정한 ‘안전지대’였지만 믈라디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계 군대가 7월 11일 도시를 점령했다. 세르비아계 군은 이후 보슈냐크계 무슬림 남성과 소년 8000여명을 가족과 분리해 조직적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집단매장했다. 여성과 어린이, 노인 수만명도 강제로 쫓겨났다. 국제재판소는 ‘제노사이드(대학살)’로 규정했으며 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최악의 학살로 규정하고 있다.

 

믈라디치가 지휘한 군대는 수도 사라예보에서도 약 3년 반 동안 도시를 포위한 채 민간인을 향한 저격과 무차별 포격을 이어갔다. 국제전범재판소는 민간인에게 공포를 퍼뜨리는 것이 군사작전의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고 판단했다. 포위 기간 1만명이 넘는 사람이 숨졌다. 세르비아계 군은 또 NATO의 공습을 막기 위해 유엔 평화유지군과 군사감시요원들을 붙잡아 인질로 삼기도 했다.

 

믈라디치는 스레브레니차 학살 직후인 1995년 7월 집단학살과 반인도적 범죄 등의 혐의로 ICTY에 기소됐지만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지역을 오가며 16년 가까이 도피했다. 2011년 5월 세르비아 북부 라자레보에서 체포돼 헤이그로 이송됐으며 이듬해 재판이 시작됐다.

 

ICTY는 2017년 11월 그에게 스레브레니차 집단살해와 박해·절멸·살인·추방·강제이주 등 반인도적 범죄, 민간인 살해·테러·불법 공격과 유엔 요원 인질 억류 등 10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이어진 보스니아 내전은 냉전 종식과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과정에서 민족·종교 갈등이 폭발하며 벌어졌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이어 다민족 지역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에 나서자 이에 반대한 세르비아계 세력이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 세력에 맞서면서 전쟁으로 번졌다. 세르비아계 군대가 장악한 지역에서는 주민 살해와 강제추방, 수용소 감금과 성폭력 등 조직적인 인종청소가 이어졌다.

 

3년 반 동안 10만명 이상이 숨지고 약 200만명이 고향을 떠났다. 희생자의 다수는 보슈냐크계였다. 스레브레니차에서 절정에 이른 학살은 이후 국제사회의 군사 개입을 촉진했고 1995년 12월 데이턴 평화협정으로 전쟁은 막을 내렸다.


믈라디치는 끝까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거나 희생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보스니아의 보슈냐크계 피해자들에게 그는 집단학살과 인종청소의 상징으로 남았지만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일부는 그를 여전히 전쟁 영웅으로 추앙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