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책임 없다’던 히로히토, 회고록에 ‘각본’ 있었다

마이니치신문 “‘독백록’ 작성 가이드라인 역할한 ‘전책연구’ 발견”
“도쿄재판 대비한 정치 문서”…히로히토 면책 논리 체계화 정황
2차 대전 종전 직후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왼쪽)과 함께 한 히로히토 일왕.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최고 군 통수권자였던 히로히토 일왕의 전쟁 책임을 부정하는 논리가 담긴 회고록이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됐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발견됐다.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최소화하는 논리를 담은 이른바 ‘독백록’이 단순한 개인 회고가 아니라 전범 재판 등에 대비해 그의 면책 논리를 정리한 ‘각본’에 따라 작성됐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자료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29일 독백록의 대본 또는 기획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전책연구’(戰責硏究)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마이니치에 따르면 전책연구는 독백록에서 다뤄질 내용을 미리 정리한 자료로, 히로히토에게 질문을 던지는 형식이 아니라 그가 전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어떤 논리로 설명할지를 제시하는 가이드라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독백록이 히로히토의 기억을 그대로 기록한 개인적인 회고가 아니라, 전쟁 책임 문제에 대한 특정한 논리를 만들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의 증언을 확보한 결과물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히로히토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최고 군 통수권자였지만, 전후에는 군부와 의회가 전쟁을 결정했고 자신은 입헌군주로서 이를 재가했을 뿐이라는 취지의 논리를 폈다.

 

이 같은 입장이 담긴 대표적인 자료가 측근을 통해 전쟁 당시 상황을 구술한 독백록이다. 독백록은 마치 히로히토가 평화를 원했지만 군부에 떠밀려 전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작성됐다.

 

연구자들은 그동안 독백록이 단순한 개인 회고가 아니라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작성된 문서라는 의혹을 제기해왔다. 이번 전책연구 발견은 이런 분석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사료로 평가된다.

 

독백록의 정치적 성격을 연구해온 요시다 유타카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전책연구에 대해 “독백록이 재판에 대비하기 위한 정치적 문서였다는 사실이 한층 더 명확해지는 것 아닌가”라며 히로히토가 전범 기소를 피했더라도 도쿄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할 상황에 대비한 자료였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전책연구를 작성한 인물도 주목된다.

 

자료의 저자는 영미법 분야에서 당시 일본 내 최고 권위자로 꼽힌 다카야나기 겐조 전 도쿄제국대 교수다. 그는 패전 이후 외무상을 지낸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자문역이자 외무성의 이론적 사령탑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졌다.

 

마이니치는 다카야나기 교수가 영미법적 사고방식에 따라 히로히토의 면책 논리를 체계화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특히 전쟁 당시의 객관적인 자료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히로히토의 증언을 확보했고, 이를 정리한 결과물이 독백록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히로히토는 패전 이후 미국 주도의 점령정책과 전후 일본의 정치적 안정을 고려한 미군정(GHQ)의 판단 등에 따라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의 전범 기소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번 문서 발견은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둘러싼 논리가 전후 그의 개인적인 해명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전범 재판을 염두에 두고 그의 책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전에 조직적으로 마련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