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빌딩 대신 영화 제작 택한 이경규, ‘복수혈전’ 적자 딛고 40년 버텨낸 예능 대부의 뚝심

수십억 원대 기회비용과 흥행 참패에도 스크린 집념 놓지 않은 희극인의 생업과 회복력

 

무대 위에서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던 예능 대부 이경규의 화려한 조명 뒤편에는, 30년 넘게 스크린을 향해 던졌던 쓸쓸한 승부수가 깊은 생채기로 남아 있다. 방송가 정상을 지키며 손에 쥘 수 있었던 수많은 부와 빌딩 매입의 기회를 고스란히 영화판에 쏟아붓고 빚더미 앞에 서기까지, 그에게 영화는 무엇이었을까. 대중에게 늘 호통치며 거침없는 웃음을 안기던 ‘천하의 이경규’는, 카메라가 꺼진 뒤 적막한 제작사 사무실에서 텅 빈 통장을 마주해야 했던 외로운 생활인이었다.

 

2013년 영화 ‘전국노래자랑’ 제작보고회 현장. 예능인의 유쾌한 가면을 벗고, 거듭된 실패 앞에서도 영화라는 오랜 꿈을 향해 진심을 털어놓던 제작자 이경규의 눈빛.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가 메가폰을 쥐고 영화판으로 뛰어든 이유는 돈이나 흥행 권력이 아니었다. 남들을 웃기는 광대로 살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남몰래 품어왔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순수한 동경, 그리고 웃음 뒤에 깃든 삶의 씁쓸한 페이소스를 온전히 스크린에 담아내고 싶다는 갈망이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예능 1인자의 순정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다. 1992년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던 영화 ‘복수혈전’의 참담한 흥행 실패는 그에게 막대한 빚과 함께 ‘코미디언의 분수 모르는 외도’라는 세간의 조롱을 안겼다. 냉혹한 상업 논리와 차가운 시선 속에서 그의 진심은 처절하게 깨졌다.

 

1992년 모든 열정과 제작비를 쏟아부었으나 뼈아픈 흥행 참패와 수억 원의 빚을 안겼던 영화 ‘복수혈전’ 포스터. 당시 전성기를 달리던 예능인의 비장했던 눈빛이 역설적인 슬픔을 자아낸다.

 

그 시절 그가 영화에 쏟아부었던 피 같은 돈을 그저 부동산이나 안전한 자산에 묻어두었더라면, 지금쯤 강남 요지의 거대한 빌딩 몇 채를 거느린 거부가 되었을 것이라는 세간의 계산은 그래서 더 뼈아프다. 영화가 망한 뒤 남겨진 수억 원의 빚을 갚기 위해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전국의 밤무대와 지방 행사장, 온갖 궂은 방송 현장을 닥치는 대로 뛰어야 했다. 쏟아지는 졸음을 쫓으며 고속도로 위 차 안에서 쪽잠을 자던 그 고단한 나날들 속에서도, 그는 신기하게도 영화를 향한 짝사랑을 끝내 놓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제 그만하라’며 혀를 찼지만, 그는 15년 만에 다시 칼을 갈아 ‘복면달호’를 세상에 내놓았고, 또다시 빚을 지면서도 ‘전국노래자랑’을 제작했다. 경제적 득실만 따진다면 바보 같은 짓이었으나, 그에게 영화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자기 존재의 증명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궤적에서 가장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대목은 실패를 마주한 그의 얼굴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참담한 패배와 빚을 남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대신 방송에 나와 자신의 가장 아픈 상처였던 ‘복수혈전’을 스스로 희화화하며 온 국민에게 웃음거리로 내어주었다. 자신의 실패마저 대중의 웃음을 위한 광대의 재료로 소비하는 그 처절한 프로 정신의 이면에는, 상처를 홀로 삭이며 버텨낸 한 인간의 깊은 슬픔과 담담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타고난 천재 예능인이라 부르지만, 그의 40여 년은 사실 버텨냄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스타가 반짝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비정한 방송가에서, 그는 영화 실패로 생긴 빚을 갚기 위해 매주 녹화장에서 후배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진흙탕에 구르며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냈다. 아무리 처절하게 실패해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세수를 하고 녹화장으로 향하는 그 성실함이야말로, 그를 오늘날까지 버티게 만든 진짜 힘이었다.

 

예능 대부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온몸을 던져 웃음을 만드는 현장. 수많은 실패와 빚을 견뎌내며 카메라 앞을 지켜온 40여 년 세월의 페이소스가 묻어난다. 이경규 유튜브 채널 ‘갓경규’ 화면 캡처

 

수천억 빌딩의 환상보다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것은, 실패의 흉터를 훈장처럼 달고 매일의 밥벌이를 위해 카메라 앞에 서온 한 인간의 굽은 등이다. 영화로 잃어버린 막대한 자산은 손익계산서 위의 숫자로만 남겠지만, 비웃음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대가를 묵묵히 몸으로 때워낸 그의 여정은 깊은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영웅의 성공담보다 우리를 더 위로하는 것은,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도 터덜터덜 제 갈 길을 걸어가는 광대의 뒷모습이다. 계산기만 두드리며 살아가기엔 너무도 팍팍한 이 세상에서, 이경규가 온몸으로 보여준 지독한 짝사랑과 삶에 대한 책임감은 오늘을 견디는 모든 평범한 이들에게 묵직한 온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