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초원의 유목민은 세계사의 주변부가 아니라, 문명과 제국의 경로를 바꾼 주체였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고전학자인 케네스 W 할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흑해 북안에서 몽골고원까지 약 8000㎞에 걸쳐 이어지는 유라시아 스텝을 무대로, 고대 유목민부터 티무르 제국에 이르는 약 4500년의 역사를 추적한다. 그는 도시와 농경 국가, 해양 교역을 중심으로 짜인 기존 세계사 서술에서 벗어나,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람과 물자, 기술과 종교를 이동시킨 초원의 역할을 전면에 내세운다.
케네스 W 할/이재황 옮김/책과함께/4만3000원
저자는 스키타이와 흉노, 훈족과 돌궐, 몽골과 티무르 제국을 각기 다른 시대에 출현한 정복 세력으로 분절해 바라보지 않는다. 이들은 광활한 초원 지대에서 형성된 기마 문화와 이동성, 부족 연합의 정치 방식, 교역로 장악 능력을 바탕으로 유라시아 여러 지역에 반복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유목민을 ‘침략자’라는 한 단어로 규정해 온 관습적 시선과 거리를 둔다. 초원 세력은 강력한 기마 군사력을 앞세워 정주 제국을 압박하고 영토 질서를 재편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은 전쟁과 약탈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실크로드 교역을 확대했고, 종교와 기술, 상품과 사상, 외교 관행의 이동을 촉진했다. 유목 제국의 부상과 쇠퇴는 주변 국가들의 방어 체계와 국경 정책, 조세 구조, 군사 조직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훈족의 이동이 유럽 내부 게르만족의 이동과 로마제국의 재편에 연결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몽골제국은 유라시아의 광대한 공간을 하나의 통치·교역권으로 묶으며 동서 교류의 조건을 새롭게 만들었다.
책은 아틸라, 칭기즈칸, 티무르 등 잘 알려진 정복자의 삶과 전쟁을 다루면서도 영웅 중심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초원 제국의 등장을 한 인물의 군사적 재능이나 야망으로 환원하지 않고, 초원의 생태 환경과 말·무기 체계, 부족 연합의 형성, 오아시스 도시와의 관계, 정주 국가의 외교·군사 대응을 함께 분석한다.
저자는 초원과 오아시스 도시, 유목민과 정주민, 실크로드와 제국의 관계를 하나의 연결망으로 제시한다. 유목 세력과 농경 국가는 끊임없이 충돌했지만 동시에 상호 의존적 관계를 형성했다. 정주 국가는 초원의 말과 군사력을 필요로 했고, 유목 세력은 도시의 생산력과 조세, 교역망을 확보하려 했다. 물자와 기술, 군사 인력, 정치적 정당성이 오가는 과정에서 양측은 서로의 질서와 문화를 바꿨다.
이처럼 할이 그려내는 유목민은 도시 문명을 위협한 적대자만이 아니다. 이들은 문명권 사이를 오가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교류를 가능하게 한 주체였다. 바다와 도시, 농경 국가를 중심으로 익숙해진 세계사 서술에 초원이라는 축을 더함으로써, 책은 세계사의 중심과 주변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다시 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