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도를 지나 경인 아래뱃길 따라 부천으로 들어서면 굴포(堀浦)가 있다. 이 굴포(堀浦)는 다른 말로 ‘판개’라고 하였는데 ‘팔 굴(堀)’과 ‘개 포(浦)’라는 한자의 우리말 뜻으로 읽은 것이다. 지금은 ‘판개’라는 우리말은 잊혀졌고 ‘굴포’를 우선해서 쓰고 있으니 우리말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대표적 지명이라 하겠다.
굴포를 지나 부천쪽으로 꽤 높은 언덕바지가 보인다. 현재의 ‘귤현(橘峴)’이다. 계양1동에 속한 귤현동은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 당산면에 속한 굴현리(屈峴里)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부천군이 신설될 때 계양면 귤현리(橘峴里)가 되면서 오늘날의 지명으로 굳어졌다.
이 마을 이름이 굴현리였던 이유는 길이 구부러졌다는 고갯길 ‘굴재’를 지나는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굴재는 계양산 동북쪽 능선이 시루지고개(현 신의주고개)로 내려와 동쪽으로 일으킨 형제봉 동쪽의 고갯길로 현재의 이름은 ‘귤현길’이다. 이 고갯길은 박촌에서 황어면으로 넘어가는 길인데, 고개가 시작하는 지점부터 형제봉의 동남끝자락인 85고지를 왼쪽으로 끼고 돌아야 한다.
지금은 도로가 확장되고 서부간선로까지 새로 개통되어 밋밋하지만, 1895년 당시의 지도를 보면 거의 직각으로 좌회전이 되는 고갯길이다. 현재 고갯마루에 귤현교회가 세워져 있고 굴재방텃길이 그 옆으로 놓여있다. 부평부내 사람들이나 박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고개의 시작부터 구부러진 고갯길이 된다. 또 고갯마루에서 올라오면 오른쪽으로 한 번, 다시 왼쪽으로 한 번 구부러져서 지그재그 이동하기 때문에 굴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이 ‘굴재[屈峴/掘峴]’가 ‘귤현(橘峴)’이 된 이유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지명 개정 당시 일본 조사관이 ‘굴재’를 ‘귤재’로 잘못 읽어서(혹은 잘못 옮겨 적으면서) 생긴 일이다. 현재는 이 고갯마루길 끝에 귤현역과 인천 전철 차량기지가 들어서서 307번 국도로 에둘러 나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구불재’에서 기원한 ‘굴재’라는 지명이 뜻밖에 ‘귤고개’ 즉 ‘귤현’으로 바뀐 채 현재에 이어져 있다. 물론 이 고개는 ‘귤(橘)’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날 ‘굴재’라는 이름은 귤현 한쪽에 있는 ‘굴재길’과 ‘굴재공원’에만 그 이름이 화석처럼 남겨져 있는데 ‘판개’는 ‘굴포’가 되었고 ‘구불재’, ‘굴재’는 ‘귤현’이 되었으니 우리네 지명의 군색함을 어찌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