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종이 위에 남는 이름

시집 나오자 첫 장 펜으로 사인
눌러 쓴 손글씨는 ‘생각의 기록’
어머니 마지막 글자는 내 이름
그리움·사랑의 기억으로 남아

모처럼 펜을 고르는 일에 몰두했다. 어떤 펜이 매끄럽게 잘 써지는지, 어느 정도의 굵기여야 그럴듯한 사인이 되는지 오래 고민하다가 펜을 서너 개 구입했다. 시집이 나오기도 전에 펜을 고르는 일이 중요한 준비처럼 느껴졌다. 어떤 문구를 써야 독자에게 내 마음을 잘 전할 수 있을까도 고민하면서, 참 오랜만에 종이에 글씨 쓰는 일에 마음을 기울였다.

 

이번 시집은 원고의 교정까지 컴퓨터 작업으로 진행했다. 시를 쓰는 것도, 시집이 완성되어 나오는 것도 컴퓨터의 몫이었다. 그런데 막상 책이 나오자 나는 시집 내지의 첫 장에 펜으로 내 이름을 썼다. 나의 서명은 독자가 책을 읽는 순간까지 함께 호흡하겠다는 약속처럼 느껴졌다. 종이의 글씨는 번지고 희미해지기도 할 텐데 그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나는 왜 아직 종이에 쓰는 일을 버리지 못할까.

천수호 시인

휴대전화의 문자는 지울 수 있지만 종이에 눌러쓴 글씨에는 쓴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간 힘과 글을 쓸 때의 속도까지 남는다. 누군가의 책을 받아 사인을 보면 펜을 세게 눌렀는지, 오래 망설였는지 느껴질 때가 있다. 이처럼 종이 위의 글자는 생각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몸의 기록이다.

 

헌책방에서 가끔 사인본 시집을 발견한다. 누군가를 호명하며 덕담을 곁들인 저자의 사인이 빛바랜 잉크로 남아 있다. 그 글씨를 보고 있으면 문득 그 작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어 묘한 쓸쓸함이 든다. 누군가에게 정성껏 건넸을 책이 이제는 헌책방에 놓인 모습을 보면, 손글씨에 남아 있는 작가의 마음이 뭉클하게 느껴진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 같은 서명은 이렇듯 시집 한 권의 인쇄된 시편들보다 오히려 더 강렬하게 그를 느끼게 한다.

 

책을 부치기 위해 혼자 조용히 내 이름을 반복해 적다가 문득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쓴 글씨가 내 이름 석 자였음을 떠올렸다. 기억이 사라져가던 어머니 앞에 흰 종이를 올려놓고 나는 안간힘을 다해 지금의 현실을 잊지 않게 하려 애썼다. 제대로 앉지도 못하셨지만 침대 머리를 세우고 두꺼운 이불을 받쳐 앉게 하여, 큰 달력 뒷장에 짧은 글씨라도 쓰게 했다. 그것이 어머니가 지금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손가락을 떨며 내 이름 석 자를 썼을 때, 나는 아이를 칭찬하듯 박수를 치며 잘했다고 너스레도 떨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그때 쓰고 있던 것은 글씨가 아니라 희미해져 가는 딸에 대한 기억을 붙잡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떠나신 뒤 나는 그 글씨를 오려 무슨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 에는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은 온몸으로 오지만 떠난 뒤에는 뜻밖의 것 하나가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대신하기도 한다. 내게 어머니는 내 이름 석 자를 쓴 그 글씨로 남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이라도 가까운 사람의 이름을 종이에 한 번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부모의 이름이나 오래된 친구의 이름을 또박또박 쓰다 보면 그 얼굴만 떠오르는 게 아닐 것이다. 화면에서 이름을 볼 때와도 분명 다른 어떤 현실감을 손끝에서부터 느낄 것 같다. 가능하다면 그 이름 옆에 ‘잘 지내’나 ‘고마워’ 같은 짧은 안부 인사 하나를 적어보는 것도 좋겠다. 말로는 차마 건네지 못했던 마음도 이름을 쓰는 동안에는 조금씩 종이 위로 옮겨갈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손글씨는 가장 느린 속도로 마음을 전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이름을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을 오래 기억하겠다는 의지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책상 한쪽에는 서명하던 펜 몇 자루가 그대로 놓여 있다.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내 이름 대신 내가 아끼는 가까운 사람의 이름을 써보려 한다. 언젠가 내 글씨도 희미해지겠지만, 그 이름을 쓰던 마음만큼은 오래 남기를 바라면서. 종이 위에 남는 것은 결국 글씨가 아니라 그 사람을 향했던 마음일 테니까.

 

천수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