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찾은 고이즈미 방위상 다카이치는 ‘요배’로 우회 참배 간토 대지진 학살 추모는 외면 한·일 협력 필요성에도 벽 느껴
일본의 8월은, 혹독하다. 덥고 습한 날씨가 낮밤을 가리지 않는데, 피폭일부터 광복절이자 일본의 패전일인 15일까지 이어지는 일정 속에서 느껴지는 사회적 공기까지 일본에 사는 한국인을 무겁게 짓누른다.
지난 8·15. 밖에서 군가 소리가 크게 울리기에 창문을 열어 보니 우익단체 차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거기서 방위성 옆을 지나면 야스쿠니신사로 향하는 큰길이 나온다. 야스쿠니신사는 군국주의 시기 일본이 종교성을 배제한 채 신사 참배를 강요하며 국민을 전쟁에 동원했던 국가신도의 핵심 시설이었고, 패전 후에는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을 합사한 곳이다. 1964년 전몰자 추도식을 이곳에서 개최해 국가의 종교적 활동을 금지한 헌법에 반한다는 국내적 반발이 있었고, 1985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총리 자격’으로 참배해 외교 문제로 비화했다.
유태영 도쿄 특파원
8·15 며칠 전 외교 당국자를 만난 자리에서 질문이 나왔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과연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단골 참배객이었던 그의 이력과 방위상이라는 공적 직위가 갖는 외교적 함의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지난해 10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에게 아쉽게 패한 뒤 줄곧 몸을 낮추고 총리와 코드를 맞춰왔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올해는 참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외교 관계를 고려하는 성숙한 정치인으로 성장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하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했다.
틀렸다. 그것도 그날 아침이 밝자마자. 그는 오전 7시쯤 현직 각료 중에서 가장 먼저 야스쿠니신사를 찾아 일본 매체 속보란을 장식했다. 방위성은 정교분리 관점에서 자위대 부대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금지하고 있는데, 그런 조직을 통할·감독하는 현직 방위상이 참배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작지 않았다. 일본 총리관저 관계자한테서조차 “공인으로서 방위상 역할보다 우파층 지지라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한 것으로 보인다”는 비판이 나왔다.
다카이치 총리는 참배를 보류했다. 중·일 관계가 악화일로인 가운데 한국까지 자극하는 것을 피하려는 외교적 셈법으로 해석됐다.
대신 그는 기묘한 수를 냈다. 전몰자 추도식 참석 차 방문한 부도칸 주차장에서 500m쯤 떨어진 야스쿠니신사를 향해 두 번 절하고 두 번 손뼉을 친 뒤 다시 절했다. 아득히 먼 곳에서 절하는, 이른바 ‘요배’(遙拜)이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전쟁 전과 전쟁 중에 세계 각지의 일본인들이 일왕 거처인 고쿄(황거)를 향해 이 같은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이것은 참배인가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한 일본 기자가 “신사를 찾은 것은 아니지 않나”라며 “다카이치가 절묘한 선례를 만든 것”이라고 평가했다. 현재는 일본인에게조차 생소한 요배라는 형식을 통해 주변국 자극을 피하면서도 국내 보수 지지층을 만족시켰다는 설명이다. 총리의 측근 의원은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형태로 참배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8월6일 인류 최초의 피폭지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평화기원식으로 시작하는 일본의 8월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와 함께 대량 학살이 자행된 간토대지진 추모행사(9월1일)로 이어진다. 이날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가 있는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과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등 곳곳에서 열린 행사에는 일본 국회의원들도 참석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여당 의원들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일본 정부는 심지어 희생자 추모와 간토대지진 학살 사건 진실 규명 촉구 간담회 등을 위해 지난달 31일 도쿄를 찾은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 등에게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생긴 전과 등을 이유로 비자를 요구했다고 한다. 앞서 수차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는 문제되지 않았던 일이 하필 이 시점에 불거진 것이다.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며 학살의 국가 책임을 부인하는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경제 현실을 생각하면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일본이 8월을 기억하는 방식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쪽에선 ‘일단 멈춤’이 되고 마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