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적 조정자 역할 나선 李 李 “북·미 신뢰 구축·대화 재개 우리가 건설적 여건 만들어야”
상대적 부담 작은 인도적 사안 대화 첫 단추 여는데 명분 있어
북·미 간 직접 대화 나선다 해도 한, 북한군 유해 있어 패싱 못 해
유해 수습 고리 대화 모색 불구 북 호응 없으면 검토에 그칠 듯
미국이 북한과의 미군 유해 수습·송환 협력 재개 가능성에 대비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이재명정부가 내세운 ‘페이스메이커’ 역할의 현실화 여부가 주목된다. 미국이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인 가운데 출발점에 한국 정부의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해 송환을 계기로 인도적 협력의 문을 열고 이를 북·미 간 협력으로 연결하고, 남북 대화로 이어간다는 구상이었다.
유엔군 장병들이 1997년 8월4일 판문점에서 6·25전쟁 당시 실종됐던 미군 유해를 북한군으로부터 인수하고 있다. 미국은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북한 지역에서 북한 측과 공동 유해 발굴을 진행, 수백 구의 유해를 송환받았다. 북한은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 합의 후 미국에 250명의 미군 유해가 담긴 상자 55개를 추가 인도했으나, 2019년 ‘하노이 노딜’로 중단됐다.세계일보 자료사진
◆‘피스·페이스메이커론’ 현실화되나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미주지역회의 평화공존 정책대화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으로 한반도 정세에 변화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생겼다”며 “북·미 간 신뢰 구축과 대화 재개를 위한 건설적 논의의 여건을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를 주도하는 ‘피스메이커’가 되고, 한국이 관련 환경을 조성하고 교류·협력을 뒷받침하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한다는 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최근 미국의 움직임은 이 구상이 현실 정치에서 작동하는 첫 사례가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통일부는 지난해 말부터 국내에 보관 중인 인민군 추정 유해를 북한에 송환하는 방안을 검토해왔으며, 지난 3월 이 구상을 백악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최근 미국에서 유해 문제가 대북 협력 의제로 급부상했다. 켈리 매케이그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 국장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합의할 경우 미군 유해 수습을 위해 북한과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는 입장을 공개했다. 2005년 중단된 북·미 공동 유해발굴을 재개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미국이 정상회담 이후의 후속 조치를 준비하는 차원을 넘어 유해 문제를 북한과의 접촉을 위한 하나의 의제로 검토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대통령의 언급이 미국의 움직임이 현지 언론을 통해 드러난 직후에 나왔다는 것은 ‘피스메이커-페이스메이커론’의 현실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
정부는 북·미 대화를 촉진하는 동시에 협상 과정에서 한국이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데도 무게를 두고 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지난달 28일 “우리는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이자 페이스메이커”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노력이 북·미 대화 재개로 이어지도록 북·미 간 신뢰 구축을 지원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의 안보태세가 이완되거나 한국이 ‘패싱’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도 유의점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유해 수습, 부담 작은 인도적 사안
유해 문제는 대화의 첫 단추로 삼기에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다. 비핵화나 대북제재 등이 남북한과 미국의 정치적 양보를 요구하는 사안인 것과 달리 전사자 예우와 인도주의라는 명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 유해 문제는 북·미 간 소통을 이어가는 계기로 작동한 적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미군 전쟁포로·실종자 유해 수습과 송환을 명시했다. 이후 북·미는 판문점에서 후속 회담을 열었다. 북한은 같은 해 7월 미군 유해를 미국에 인도했다. 양측은 현장 공동발굴 재개에도 합의하는 등 실무 협의를 이어가는 통로로 활용됐다.
특히 한국 정부로서는 유해 문제가 북·미 대화 국면에서 역할을 확보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톱다운’ 대화가 빠르게 진행될 경우 남북 대화가 막혀 있는 한국의 입지가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유해 문제의 경우 국내에 북한군 유해가 보관돼 있어 남북 간 협의로 확장할 여지가 있다. 북한 내 미군 유해 수습이라는 북·미 협력 사안을 남북 간 유해 송환과 연계할 경우 북·미 대화를 남북 대화 재개의 계기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움직임이 한국 정부의 제안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의미는 더욱 크다. 한국이 북·미 대화를 단순히 촉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양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의제를 발굴해 대화의 여건을 만들어낸 실질적 조정자의 역할을 한 것이기도 때문이다. 이 경우 ‘페이스메이커’라는 표현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한국이 대화의 의제와 순서를 설계하는 외교적 역할을 뜻하게 된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16일(현지시간) 프랑스 에비앙레뱅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공식 만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 X 캡처
◆북한의 호응 여부가 관건
그러나 현재 단계에서 ‘페이스메이커론의 현실화’라고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유해 수습을 고리로 한 미국 정부의 대화 모색에 북한이 응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이재명 정부의 대화 제의나 대북 유화 조치에 뚜렷한 호응을 보이기는커녕 남북한을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해 적개심만 드러내고 있다. 김여정 노동당 부장도 지난달 이 대통령을 향해 “안팎이 다른 이중적 언행은 한국의 불안초조한 모순심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대화 의지를 잇달아 보이는 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결국 관건은 북한의 선택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접촉에 응하고, 이를 남한과의 대화로 이어간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호응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준비는 자체적인 대북 접근 검토에 그칠 수 있다. 김태형 숭실대 교수는 6일 “북한이 유해 문제에 미국만큼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유해 송환을 본격 추진했을 때 당사국들이 가지는 외교적 효과와 부담을 함께 따져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런 점에서 세계일보의 질의에 DPAA가 언론 간담회를 열겠다고 답한 점이 주목된다. 관련 사항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구상을 밝히겠다는 것으로 북한을 협상으로 이끌기 위한 방안을 공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