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훈 기자] 1990년대만 해도 이란 남자배구 대표팀은 아시아에서도 변방에 머물렀다. 그러나 2002년부터 박기원 감독이 부임해 시스템을 정비하고 선수들을 양성하면서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유럽 인종의 원류를 이루는 아리아인의 피가 흐르는 이란 선수들의 훌륭한 피지컬과 박 감독의 지도력이 더해지면서 이란 배구는 단숨에 아시아 정상권으로 올라섰고, 박 감독이 떠난 이후 이란 배구는 세계 무대에서 호령할 수 있는 강호로 올라섰다. 지금도 박기원 감독은 이란 남자배구의 토대를 닦은 사령탑으로 이란 현지에서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초와 시스템이 부족한 팀을 맡아 정상궤도로 올리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보유한 ‘박기원 매직’이 태국에서도 빛을 발하는 모양새다. 박기원 감독이 이끄는 태국 남자배구가 한국 남자배구를 또 다시 울렸다.
이사나예 라미레스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지난 7일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립 종합체육관에서 열린 대회 조별리그 C조 2차전에서 태국에 풀세트 접전 끝에 세트 스코어 2-3(18-25 16-25 25-20 25-22 12-15)으로 패했다. 한국은 지난 6월 아시아배구연맹(AVC)컵 조별리그에 이어 이번에도 태국에 2-3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도 비교우위가 거의 사라진 한국 배구의 현주소가 제대로 드러난 한 판이었다.
세트 스코어는 2-3이지만, 모든 면에서 태국에 밀렸다. 공격 득점 57-65, 블로킹 득점 4-13, 서브 득점 5-6까지. 한국이 이길래야 이길 수 없었던 경기였던 셈이다. 1,2세트는 그야말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패했다. 그나마 3세트부터 에이스 허수봉의 분전과 고비마다 터져나온 차영석의 번뜩이는 움직임으로 두 세트를 만회했지만, 5세트 접전 상황에서 서브 에이스를 헌납한 뒤 공격 범실이 나오면서 ‘승리’라는 두 글자를 챙기는 데 실패했다.
한국은 에이스 허수봉이 25점, 부상으로 5세트는 뛰지 못한 아포짓 임동혁이 14점을 올리긴 했지만, 두 선수를 제외하면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린 선수가 없었다. 반면 태국은 1m88의 단신이지만, 탄력이 돋보인 가나 귀화선수 출신인 나파뎃이 무려 63.89%의 공격 성공률로 25점을 몰아쳤고, 아웃사이드 히터 콤비 차이왓과 타낫이 20점, 13점으로 뒤를 받쳤다. 미들 블로커 투파딧도 블로킹 4개 포함 11점을 올렸다.
경기 이튿날인 8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박기원 감독에게 ‘태국, 너무 잘 하던데요?’라고 묻자 “잘 하긴 뭘 잘해. 개발에 땀 나 듯이 뛴 거지”라며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어 “태국 선수들이 잘 한 경기였다. 우리 애들이 이렇게 잘 한 것 처음 본 것 같다”고 제자들의 분전을 흡족해했다.
라미레스 감독이 이끄는 한국에 대한 평가도 부탁하자 “상대 팀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게 조심스럽긴 하다”면서도 “한국은 국제대회에 나와서 내놓을 만한 분야가 없다. 공격이나 블로킹, 수비, 서브 등 모든 면에서 딱 그 정도다. 그래서 어느 상대를 만나도 쉽게 풀어갈 수 있는 경기가 없다. 고전하고 어려운 경기를 할 수밖에 없다”라고 답했다.
미들 블로커 출신으로서 특히 미들 블로커 조련에 일가견이 있는 박기원 감독인 만큼, 블로킹에서 압도적으로 밀린 게 패인이었다. 워낙 한국 배구에 대한 속속들이 알고 있는 박기원 감독이기에 태국 선수들은 한국의 공격 루트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13개의 블로킹을 잡아냈다. 기록된 블로킹 득점만 13개일뿐, 유효 블로킹에 이은 수비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박기원 감독은 “블로킹이라는 게 미들 블로커만 잘 해서 되는 건 아니다. 사이드 블로커들의 도움도 필요하다. 남자배구에서는 블로킹의 도움 없이는 수비가 잘 될 수 없다. 태국에 와서 가장 많이 신경쓴게 블로킹 시스템이다”라고 설명했다.
태국의 에이스로 활약한 나파뎃도 박기원 감독의 작품이다. 박기원 감독은 “원래 아웃사이드 히터였던 선수인데, 리시브가 그리 좋지 않은 선수라 아포짓 스파이커로 전향시켰다. 키는 작지만 워낙 탄력이 좋은 선수다. 공격적인 재능을 살리기 위해 포지션 전향시킨 게 잘 먹혔다”라고 답했다.
카타르전 3-0 승리, 한국전 3-2 승리를 거둔 태국 대표팀이 4강 이상 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자 박기원 감독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팀이다. 아직 성장 중인 팀이기에 시행착오가 많다”라면서도 “열심히 해봐야지”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