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의 랜드마크로 통하는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에서 제작됐다. 19세기 후반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가 건넨 선물이다. 1776년 당시 영국 식민지이던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뒤 프랑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미국 건국은 실패하거나 한참 뒤로 뒤로 미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프랑스를 우습게 여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태도가 프랑스인들로선 영 못마땅할 것이다. 2025년 3월 어느 프랑스 정치인이 트럼프의 반(反)이민 정책을 비판하며 “자유의 여신상을 반환하라”고 요구하자 당시 백악관 대변인은 이렇게 응수했다. “프랑스인들이 지금 독일어를 쓰고 있지 않은 것은 미국 덕분임을 기억하세요.”
어디 프랑스뿐인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당시 영국을 제외한 유럽 주요국 대부분이 나치 독일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해 독일을 무찌르고 유럽을 해방시킨 공적은 아무리 칭송을 받아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도 “미국이 아니었다면 유럽 국가들은 독일어를 쓰고 있을 것”이라는 트럼프의 자화자찬은 솔직히 듣기에 불편한 것이 현실이다. 지난 4월 미국을 국빈으로 방문한 찰스 3세 영국 국왕은 만찬 도중 작심한 듯 “우리(영국)가 없었더라면 여러분(미국인들)은 프랑스어를 쓰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어와 비교하면 프랑스어 배우기란 얼마나 까다로운가. 트럼프가 파안대소를 터뜨린 것은 당연하다.
미국과 달리 캐나다에는 프랑스어가 뿌리를 내렸다. 18세기 후반 캐나다 지배권을 놓고 다툰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은 영국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영국은 지금의 퀘벡주(州)에 정착한 프랑스계 주민들을 탄압하지 않았다. 되레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철저히 존중하는 포용주의 정책을 폈다. 20세기 들어 독립국이 된 캐나다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나란히 공용어로 채택했다. 캐나다 인구의 절대 다수일 뿐더러 정치·경제·사회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주류의 지위를 누리는 영어권 주민들에게 이는 썩 달가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어를 몰라도 일상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는데, 공직 등을 맡으려면 프랑스어를 꼭 배워야 하니 불만이 생겨난다.
요즘 ‘무역 전쟁’을 벌이고 있는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난데없이 프랑스어가 소환됐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상품 설명서 등에 영어·프랑스어를 병기하도록 한 캐나다 법률에 미국이 이의를 제기했다”며 “우리로선 프랑스어 보호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트럼프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을 사랑한다”고 밝혔다. 프랑스 언어와 문화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퀘벡주 주민들의 정서를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영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프랑스어 위상은 예전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프랑스어를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명백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