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비즈로 3차원 공간 그리는 박선기 작가
호텔신라·인천공항 등 대형 작품 유명
다나 ‘바소(VASO)’ 레이블에 수묵화 드로잉
대학때 부모 여의고 공수 부대 자원 입대
고공 낙하 훈련 수당 3000만원 모아 졸업
이탈리아 브레라 국립미술원서 어렵게 유학
현지 갤러리 스카우트·본격 전업 작가 길로
서울 장충동 호텔신라 로비 천장을 가득 채운 ‘집합체(An Aggregation) 130121’.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24m 높이의 거대 조형물 ‘집합체 190707’. 이곳을 오가는 이들은 제목은 몰라도 작품을 보는 순간 탄성을 터뜨린다. 수만 개의 아크릴 비즈를 나일론 줄에 매다는 기법으로 환상적인 공간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3차원 공간을 통째로 캔버스 삼아 작품으로 빚어내는 ‘설치미술 거장’ 박선기(60) 작가의 작품이다. 세계적인 루이비통 파운데이션 등도 그의 작품을 소장할 정도로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그가 최근 와인병 레이블에 자신의 예술세계를 옮겨 담았다. 평생 3차원 공간을 무대로 삼은 그가 왜 갑자기 한 뼘도 안 되는 캔버스에 눈을 돌렸을까.
◆와인 레이블에 빚은 수묵 달항아리
작가의 개인전 ‘The Origin of Space’가 열리고 있는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 더 헤리티지 뮤지엄으로 들어서자 박 작가가 반가운 표정으로 맞는다. 그는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한국인 소유 와이너리 다나 에스테이트(Dana Estates)의 대표 와인 바소(VASO) 4개 빈티지(2020~2023)의 레이블 작업을 맡았으며, 달항아리 등 4개의 수묵화 작품으로 완성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바소는 이탈리아어로 ‘항아리’ ‘화병’을 뜻한다. 한국인이 소유한 다나는 애초 조선 백자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받아 와인 이름을 바소로 지었고, 초기 레이블에 사진작가 구본창의 달항아리 사진을 사용했다. 다나 와인을 수입하는 에노테카코리아는 창립 15주년을 맞아 이 달항아리 스토리를 되살릴 작가를 수소문한 끝에 박 작가를 낙점했다. 그가 전에 와인 업계에서 드문 ‘완판 기록’을 세운 것이 결정적이다. 와인과 미술이 만나는 스페셜 레이블 프로젝트는 화려해 보여도 실제 완판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박 작가는 몇 해 전 이탈리아 피에몬테 와이너리 미켈레 키아를로와 협업하면서 기존에 만들어 놓았던 화분과 드로잉 작품을 사용했는데 출시되자마자 완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트 레이블 프로젝트에서 완판을 기록한 국내 작가는 박 작가와 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 클라세 1등급 샤토 무통 로칠드 2013 빈티지에 작품을 담은 이우환 작가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다.
막상 작품을 의뢰받았지만 쉽지 않았다. 대형 설치작품을 주로 만들던 그가 손바닥만 한 캔버스에 에너지를 응축시켜야 하는 이번 작업은 좀 낯설었다. “처음에는 뭘 어떻게 그려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어요. 그러다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을 떠올려 물방울로 그리기 시작했죠. 색깔별로 여러 점을 그려 보여주자 수입사 측에서 반색하더군요. 그런데 정작 저는 개운치 않았어요. 바소라는 이름과 안 어울리는 거예요.” 이에 스스로 시안을 뒤집은 그는 다시 원점에서 고민했다. “화병이라면 조선시대 백자, 그중에서도 달항아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백자를 그려보기 시작했어요.”
마침 2022년 검은 숯 조각을 나일론 줄에 매달아 멀리서 보면 먹으로 그린 듯한 달항아리가 공중에 떠 있는 착시를 자아낸 연작 ‘집합체 20220719’를 완성해 둔 터였다. 정면에서 보면 완벽한 입체이지만 옆으로 비켜서거나 다가가면 형태가 흩어져 버리는 그 3차원 수묵화를, 이번엔 진짜 수묵 드로잉으로 옮겨보자는 결심이 섰다. 그럼에도 정작 와인의 맛을 그림에 녹여내는 일은 또 다른 난제였다. “4개 빈티지를 마셔보면 다 비슷하게 느껴지더군요. 이탈리아 밀라노 유학 시절부터 밥 먹을 때마다 잔에 따라주는 가성비 와인을 많이 마셨지만 네 개 빈티지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해 그림으로 옮기는 건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시음한 뒤 기후가 가장 완벽했던 2021년산을 꽉 찬 완성형 달항아리로 표현했다. 나머지 세 빈티지도 도자기의 형태와 파편의 배치, 여백까지 하나하나 결정해 나갔다.
그렇게 프로젝트에 두세 달을 매달렸는데, 정작 그림 자체는 한 점을 그리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손을 계속 대면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어서 큰 붓질 몇 번으로 완성했답니다.” 그림에는 마치 우연히 튄 듯한 물방울 모양 파편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 역시 영리하게 계산된 배치다. 작가는 이번 작업이 남달랐다고 돌아본다. “이렇게 와인에 그림을 매칭하는 일은 흔치 않잖아요.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었어요. 평소와는 좀 다른 생각을 해야 했으니까요. 와인은 자연이 시간과 함께 빚어낸 형태입니다. 저는 그 형태가 지닌 침묵과 울림을 그림으로 옮기고자 했답니다.”
이렇게 ‘바소 박선기 컬렉션 아트 레이블’이 완성됐고, 수입사는 작가의 친필 사인이 담긴 300세트를 선보였는데 제품이 나오기도 전인 지난 6월 선주문으로 모두 팔리는 등 3000병이 완판됐다. 이에 추가로 2000병을 더 만들었다.
◆깡촌 소년에서 설치미술 대가로
1846년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나파밸리 심장부 러더포드(Rutherford) 땅에 자리한 다나는 한때 화재로 폐허가 됐었다. 이를 이희상 전 동아원 그룹 회장이 2005년 인수해 나파밸리를 대표하는 와이너리로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숯이 돼버린 잔해에서 새 와이너리가 시작된 스토리가 묘하게도 박 작가의 작품세계와 닮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주로 숯을 주렁주렁 매달아 3차원 공간에서 고대 건축물의 기둥 및 아치, 한국 전통 건축과 문화재 탑 등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숯은 단순히 까만 덩어리가 아니라 ‘나무의 마지막 모습’이자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에서 다나와 만남은 운명적이다.
그가 지금은 전 세계의 컬렉터들의 러브콜을 받는 세계적인 작가로 평가받지만 어린 시절은 아주 불우했다. “경북 구미시 선산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마을 전체가 네 가구뿐이라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어요. 열 살 터울인 형과 누나가 일찌감치 대구로 유학을 떠난 뒤로는 매일 혼자 들판을 뛰놀며 자랐죠.”
박 작가는 가족이 왜관으로 이사하면서 독일 베네딕트 수도원 재단이 세운 순심중·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입학식 날 얼떨결에 붙들려 들어간 미술부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6년간 미술부에서 매일 그림을 그리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은사의 “그림 그리는 사람은 너무 많다. 앞으로는 입체가 대세다”라는 한마디에 진로를 조각으로 틀었다.
하지만 2남1녀 중 막내인 그는 중앙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학년 봄, 부모를 잃는 아픔을 겪는다. 이에 그는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려고 공수부대에 자원입대했다. 당시 사병 월급은 40만~50만원 남짓이었지만, 위험한 고공낙하 훈련을 자원할 때마다 회당 8만원씩 붙는 생명수당 덕에 4년6개월 만에 3000만원에 가까운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이 돈으로 등록금, 생활비, 재료비를 충당하며 어렵게 대학을 마쳤다.
졸업 후엔 편도 비행기표 한 장만 끊어 무작정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을 떠났다. “스물여섯 살 때였죠. 1년 동안 죽어라 이탈리아어를 공부한 뒤 어렵게 브레라 국립미술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어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한국 식당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했죠. 그러다 ‘내가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모두 그만두고, 굶어 죽을 때까지 해보자는 각오로 작품에만 매달렸답니다.”
그 결심은 오래지 않아 결실을 맺었다. 학업 도중 유대계 미국인 화상과 오스트리아계 건축가, 이탈리아인 출판업자가 운영하던 밀라노 갤러리 ‘로렌스 루빈’으로부터 전속 계약 제안을 받았다. 내로라하는 중견작가들만 소속돼 있던 그 화랑에서 그는 가장 어린 작가였다. 이때부터 그는 졸업장 대신 작가의 길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2002년 소속 화랑이 초청받은 제1회 한국국제아트페어 참가를 계기로 유학 후 처음 고국 땅을 밟았다. 이어 서울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열며 국내에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금세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2006년 제9회 김종영조각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는데, 서울대 출신이 아닌 작가로는 첫 수상이다.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완성된 면
더 헤리티지 뮤지엄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은 13일까지 진행된다. 1935년 조선저축은행으로 지어져 SC제일은행 본점으로 쓰이다 문화공간으로 거듭난 이 근대문화유산 건물의 4층 뮤지엄과 5층 중앙정원에서 박 작가는 대형 설치작품 ‘집합체’ 신작 3점과 조각, 드로잉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지난해 강원 양양 산불 당시 불에 탄 목재를 가져다 한옥 모양으로 짜맞춘 뒤 이를 천장에 매달았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서양식 건물 안에 소실된 한옥을 세워 자연, 인간,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공간을 보여준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점-선-면’ 3부작을 완성했다. 점의 시작은 숯이다. “처음부터 숯을 다룬 건 아니에요. 대학 시절 깨진 돌조각을 매달아본 게 시작인데, 너무 무거워서 설치비가 많이 들더군요. 그러다 자연을 대표할 소재로 나무에 주목했고 나무가 불을 견뎌 마지막에 다다르는 형태, 즉 숯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더군요.”
매다는 방식을 택한 이유는 다분히 전략적이었다. “숯을 어떻게 작품으로 구현할까 고민하다 세우다, 박다, 기대다 등 모든 동사를 숯에 대입해 봤어요. 그러다 ‘매달다’에 확 꽂혔어요. 대부분의 공간은 바닥 위 2m 지점부터는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경쟁자가 없는 빈 공간을 공략한 겁니다.”
그렇게 매단 숯 조각들은 보는 각도에 따라 완벽한 형상으로 뭉쳤다가 다시 무질서한 점들로 흩어지며 이런 비움이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한다. 작가는 숯(점)으로 한옥의 기둥과 보 등의 형태를 만들어 선으로 나아갔고 이번 전시회에선 숯을 조밀하게 배열해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나 캔버스 화면 같은 ‘면’을 만들어 냈다.
평생 매다는 일을 했으니 좀 지겹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다시 다른 매다는 작업을 구상 중이란다. 바로 모빌이다. “평생 이 작업을 해왔으니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지를 활용한 모빌을 구상 중이랍니다. 그룹전에서 조금씩 선보였는데 반응이 좋아요. 큰 작품보다 오히려 작은 작품에 더 신경이 쓰입니다. 작은 건 자칫하면 볼품이 없어지기 때문에 진짜 섬세하게 작업해야 하기 때문이죠.”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짧게 답했다. “열심히, 끊임없이 도전하세요.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 박선기 조각가는
●1966년 경북 구미 출생 ●중앙대학교 조소학과 졸업(1994) ●밀라노 브레라 국립미술원 졸업(2002) ●갤러리 서호 개인전으로 작가 데뷔(1994) ●밀라노 ‘갤러리 로렌스 루빈’ 전속 작가(1997) ●베를린 갤러리 아트인프로그레스 개인전(2002) ●마드리드 갤러리 에두르네 개인전(2004)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 선정(2005) ●제9회 김종영 조각상 수상(2006) ●호텔신라 로비 대형 조형물 ‘집합체(An Aggregation) 130121’ 설치(2006~) ●경주 우양미술관 개인전 ‘뷰티풀’(2015) ●김세중미술관 개인전(2018) ●대구 인당뮤지엄 개인전 ‘SPACE’(2020)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공간 조형물 ‘집합체 190707’설치(2020) ●신세계백화점 더 헤리티지 뮤지엄 개인전 ‘The Origin of Space’(2026) ●프랑스 루이비통 파운데이션, 삼성전자, 삼성물산 등 작품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