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시아 지방 폰테베드라주에 자리한 비고(Vigo)는 대서양을 품은 항구 도시다. 지도를 펼쳐 보면 이베리아반도 서쪽 끝자락에 놓여 있고, 조금만 더 내려가면 포르투갈과 국경을 맞댄다. 한 도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이름의 뿌리부터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비고라는 이름은 라틴어 ‘비커스(Vicus)’에서 유래했다. 고대 로마에서 ‘마을’이나 ‘촌락’을 뜻했으며, 도시 안의 ‘구역’이나 ‘거리’를 가리키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역시 로마시를 여러 개의 비커스로 나누어 행정을 관리했다고 한다.
비고는 오래전부터 어업의 중심지로 성장해 왔다. 바다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구시가지와 현대적인 마리나 시설이 공존하며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도시와 항구를 한눈에 내려다보기 위해 비고 시민들이 즐겨 찾는 카스트로 카스티요 요새에 올랐다.
요새의 성벽 위에 서자 가슴이 탁 트인다. 비고 시내와 비고 만(Ría de Vigo)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왼쪽의 돌로 만든 작은 감시탑(Guaita)은 17세기 포르투갈과의 전쟁 당시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요새의 상징적인 구조물이라고 한다. 성벽 아래로는 정갈하게 가꾸어진 카스트로 공원의 산책로와 정원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바다를 품은 도시의 붉은 지붕들이 이어진다. 낮에는 푸른 바다와 도시가 선명한 대비를 이루지만, 해 질 무렵이면 비고 만 너머로 석양이 내려앉아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가능하다면 저녁 무렵 이곳을 찾기를 권하고 싶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요새 안쪽에는 시민들이 느긋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돌 성벽과 연못, 오래된 나무가 어우러진 이곳은 비고 시민들과 여행객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는 휴식처다. 정원 중앙의 작은 분수대와 연못 주변에는 계절마다 꽃들이 피어나 성벽의 거친 질감과는 대조적인 평화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음 목적지로 향하던 길에 비고의 또 다른 상징인 스페인 광장을 지나게 됐다.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ña)은 비고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랜드마크다. 광장에 들어서면 말 기념비(Monumento a los Caballos)의 거대한 청동 조각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은 갈리시아 출신 조각가 후안 올리베이라가 디자인해 1991년에 설치했다. 마드리드에서 도로를 따라 비고 도심으로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말 그대로 도시의 관문 같은 존재다. 소용돌이치듯 솟아오른 인공 폭포 형태의 구조물 위로 다섯 마리의 역동적인 말이 하늘을 향해 도약한다. 과거 비고 주변의 산을 자유롭게 누비던 갈리시아 야생마에게 바치는 헌정 작품이라고 한다. 높이 18미터, 무게 약 40톤에 이르는 압도적인 규모 또한 이 조형물의 존재감을 더한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비고를 대표하는 축구팀 셀타 비고의 홈구장, 에스타디오 아반카-발라이도스였다. 이곳을 찾은 데에는 지금은 은퇴한 우리나라의 박주영 선수가 한때 활약했던 경기장이라는 개인적인 관심도 있었다. 스페인 라리가의 RC 셀타 비고(Celta de Vigo) 홈구장은 인상적인 외관부터 눈길을 끈다. 대서양과 맞닿은 항구 도시의 정체성을 담아 바다의 파도를 형상화한 푸른빛 알루미늄 외벽이 특히 돋보였다. 1928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경기장으로,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당시 조별 예선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2030년 FIFA 월드컵 경기 개최를 목표로 수용 인원을 3만1000석 규모까지 늘리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비고를 돌아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도시 어디에서나 바다를 가까이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카스트로 요새에서 내려다본 비고 만과 항구, 스페인 광장의 말 기념비, 그리고 파도를 형상화한 셀타 비고의 경기장까지 비고의 여러 모습 속에는 대서양과 함께 살아온 도시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스페인의 대도시와는 분명 다른 매력을 가진 곳이다. 언젠가 갈리시아를 다시 찾는다면 해 질 무렵 카스트로 요새에 올라 붉게 물드는 비고 만을 다시 한번 천천히 바라보고 싶다.
이은진 스페인전문가·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