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울산 동구청 강당. ‘2026 한·일 문화교류 일본 비젠시 방문단 환영식’이라고 적힌 현수막 아래로 일본 초등학생 12명이 자리를 잡았다. 일본 오카야마현 비젠시에서 바다를 건너 울산 방어진을 찾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3박 4일 동안 울산 동구에 머물렀다. HD현대중공업의 조선 현장을 둘러보고 한국 전통공예와 K-POP 댄스를 체험했다. 숙식은 동구 주민들의 집에서 했다. 밥을 함께 먹고 생활하는 홈스테이는 이번 방문의 중요한 일정이었다.
일본 도시의 초등학생들이 울산 동구를 찾는 풍경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34년째다. 한 해는 비젠시 아이들이 동구를 찾고, 이듬해에는 동구 아이들이 비젠시로 향한다. 지난해 동구 학생들이 일본을 찾은 데 이어 올해는 비젠시 학생들이 울산을 방문한 것이다. 두 도시 아이들이 30년 넘게 서로의 집을 오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연은 울산 동구 방어진 골목 곳곳에 남아 있는 100여년 전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방어진에는 지금도 ‘히나세골목’으로 불리는 곳이 있다. 히나세는 현재 비젠시에 통합된 일본 지역의 이름이다. 골목 주변을 걷다 보면 100년 넘은 옛 목욕탕과 전당포 건물, 일본식 주택인 적산가옥 등도 만날 수 있다.
방어진에 일본 지명과 건축물이 남게 된 배경은 19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7년 일본 선박 한 척이 좌초돼 방어진에 닿았다. 이후 이 일대에서 삼치류가 잘 잡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가가와현과 오카야마현 등지의 어민들이 하나둘 방어진으로 건너왔다. 1910년을 전후해 30가구 정도였던 일본인 가구는 1940년대 500여 가구까지 늘었다. 작은 어촌이던 방어진의 모습도 빠르게 달라졌다. 일본식 잡화상이 들어서고 방파제가 만들어졌다. 유곽과 우체국, 전당포, 금융조합, 일본수산 출장소, 여객터미널과 영화관까지 차례로 생겼다. 울산에서 전기가 가장 먼저 들어온 곳도 방어진으로 전해진다. 히나세 출신 주민들이 모여 살던 골목에는 아예 고향의 이름을 따 히나세골목 이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방어진에 살던 일본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방어진과의 인연까지 끊긴 것은 아니었다. 방어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들은 귀국한 뒤에도 자신들이 다녔던 방어진심상소학교, 현재의 방어진초등학교 한국인 동창들과 연락을 이어갔다. 일본에서는 부모와 자신들이 살았던 방어진의 사진과 기록을 모으기 시작했다. 방어진 관련 자료를 전시하며 어린 시절의 마을을 기억하는 활동도 벌였다.
1964년에는 ‘방어진회’까지 결성했다. 회원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방어진의 모습과 기억을 기록하고 자료를 모아 후대에 남겼다. 세월이 흐르면서 방어진회 회원들이 고령이 되고 활동도 점차 줄었지만, 두 지역의 인연은 다른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넘어갔다.
그 연결고리가 바로 ‘아이들’이었다. 1993년 울산 일산중학교와 당시 일본 히나세의 일생중학교가 학생을 서로 보내 홈스테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교 간 교류였지만 장기간 사업을 이어가는 데 따른 재정적 부담 등이 생기면서 2003년부터 울산 동구문화원과 히나세 교육위원회가 교류를 이어받았다. 2005년 히나세가 비젠시로 통합된 이후에는 울산 동구와 비젠시가 우호협력도시 협정을 맺었다. 교류 대상도 특정 학교 학생에서 두 지역 전체 학생으로 확대됐다. 그렇게 시작된 아이들의 왕래가 올해까지 34년째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조선업의 중심지인 울산 동구와 도자기·벽돌·어업으로 이름난 일본 비젠시. 겉으로 보면 별다른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도시를 100년 전 방어진 바다에서 시작된 인연이 지금까지 연결하고 있는 셈이다.
오랜 교류는 지난해 일본에서도 의미를 인정받았다. 주일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제14회 다카마도노미야 기념 한일교류기금 현창식’에서 한일청소년교류사업 특별상을 받았다. 동구는 옛 적산가옥을 활용해 ‘방어진박물관’을 조성했다. 박물관에는 당시 방어진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사진과 유물, 방어진회 등이 남긴 기록이 전시돼 있다. 특히 일본인 마을해설사가 방문객들에게 당시 일본인들이 방어진으로 건너온 과정과 두 도시가 공유하고 있는 역사를 직접 설명한다. 비젠시와 동구 학생들이 서로의 도시를 찾을 때도 이런 역사를 빼놓지 않고 알려준다.
동구문화원 관계자는 “100여 년 전 시작된 인연을 단순히 과거의 역사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두 도시가 공유한 역사를 미래 세대가 이어갈 수 있도록 학생 교류를 계속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