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세운 승전 기념비에 日 ‘격노’ “북방 영토 돌려달라” 요구는 묵살 1945년 이후 아직 평화 조약 없어 러 역사 통찰하고 위협에 대비해야
러시아에서 날아든 사진 한 장이 일본 열도를 뒤집었다. 극동 하바롭스크 시내에 최근 들어선 대일 전승 기념비를 촬영한 것이다. 소련군 병사가 과거 일본이 세운 국경 표지석을 소총으로 깨부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이 새겨진 표지석은 ‘대일본제국 경계’(大日本帝國 境界)라는 일곱 글자가 선명하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가 러시아를 규탄하며 “정부가 철거를 촉구하겠다”고 다짐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일본 국민 감정과 관련된 문제”라는 다카이치 발언에서 사안의 심각성이 느껴진다.
2차대전 당시 소련과 일본은 각각 연합국, 추축국 일원이었다. 그런데 두 나라가 직접 싸운 기간은 무척 짧다. 소련은 전쟁 막바지인 1945년 8월8일에야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일왕이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기 일주일 전이다. 물론 8·15 이후 한동안 사할린과 쿠릴 열도 일대에선 양국의 교전이 벌어졌다. 그렇더라도 9월 초쯤 싸움은 이미 끝났다. 소련은 승전국이라곤 하나 대일 전쟁에는 1개월 남짓 참여했을 뿐이다. 일본 입장에선 소련의 전승국 행세가 솔직히 아니꼬웠을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흔히 “2차대전 때 독일이 좀 더 오래 버티거나 일본이 좀 더 일찍 무너졌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고들 한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일리가 있다. 대전 당시 소련의 최대 적은 독일이었다. 그래서 ‘일본과의 전쟁에도 좀 나서달라’는 미국의 요청에 난색을 표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의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독일이 제거되면 그 이후 대일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얼마 뒤 독일이 항복했다. 연합국의 당초 예상에서 한참 벗어난, 때 이른 붕괴였다고 하겠다.
소련이 병력과 장비를 동쪽으로 보내는 등 비로소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미국은 원자폭탄을 완성했다. 미국이 보기에 이제 소련의 도움은 무의미했다. 1945년 8월6일 미군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 깜짝 놀란 소련은 그 직후 일본 치하에 있던 중국 만주와 한반도 북부 그리고 사할린 등 공략에 나섰다. 가만히 있다간 ‘전리품’을 몽땅 미국에 빼앗기겠다 싶어서였다. 결국 이것이 단초가 돼 한반도의 일본군 무장 해제란 명목 아래 38선 이북은 소련군, 이남은 미군이 각각 점령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1951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2차대전 연합국들과 전범국 일본 간에 강화 조약이 체결됐다. 소련은 불참했다. 전쟁 막바지 소련군은 쿠릴 열도의 4개 섬(일본명 ‘북방 영토’)까지 차지했다. 이를 불법 강탈로 규정한 일본이 “북방 영토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자 아예 평화 협정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회의 이후에도 소련 및 그 후예인 러시아와 일본 간에는 2차대전 종전을 위한 평화 회담이 이어졌다. 그러나 매번 북방 영토 문제로 결렬됐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주요 7개국(G7)의 일원인 일본이 대러 제재에 나서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아예 종전 협상 중단을 선언했다. 러시아·일본 양국은 1945년 이후 아직도 법적으로는 ‘휴전’ 상태인 셈이다.
이재명정부는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감안해 러시아와 잘 지내고자 애쓰고 있다. 남북 관계 개선에 러시아가 기여할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부당한 침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방공 무기 지원 요청에도 냉담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러시아는 북한과 군사적으로 밀착하며 동북아 지역에서 한·미·일 3국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 청년 수천명이 전사한 마당에 러시아가 ‘혈맹’ 북한과 한국 사이에서 누구 편을 들지는 뻔하다. 러시아 역사를 되돌아보면 오로지 자국 영향권 확대에만 혈안이 돼 장애물로 여겨지는 주변국들은 거침없이 짓밟는 냉혹함이 두드러진다. 요즘 일본을 적대시하는 러시아의 ‘화살’이 언제 방향을 바꿔 한국을 겨냥할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