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라는 자살로 어머니를 잃었다. 세 살 때였다. 마흔아홉에는 언니를 잃었다. 같은 이유였다. 세라의 인생 목표는 자연사(自然死)다. “끝까지 제 명대로 살다 가는 게 목표예요.” 무덤덤한 말투였다. 지난해 처음 나간 하프 마라톤 대회에서 제한시간을 35분 넘기고도 끝까지 달렸고, 지금도 심리상담을 받고 처방받은 약을 거르지 않는다.
2023년 2월의 어느 아침, 세라는 언니 집에서 눈을 떴다. 경북 경산에 사는 그는 서울에 오면 늘 언니 집에 묵었다. 그날은 언니가 자기 침대를 동생에게 내어주고 조카 방에서 잤다. 일어나 보니 언니가 없었다. ‘일찍 출근했네.’ 그렇게 생각하고 피아노 레슨을 하러 집을 나섰다.
오후에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어디 갔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하고 끊었다. 경산에 내려와 있는데 다시 전화가 울렸다. 언니가 자동차 열쇠와 휴대전화를 두고 사라졌다고 했다. 껌딱지처럼 데리고 다니던 강아지도 집에 있었다. 그날 밤 가족은 경찰에 신고했고, 언니는 다음 날 오후 집 밖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서는 없었다. 징후도 없었다. 사나흘 전부터 카카오톡 메시지가 줄어든 것 같다는 생각은 한참 뒤에야 해보는 짐작이었다. “이유가 한 가지는 아닐 거예요. 여러 가지가 결합했겠죠.”
자연사가 목표라는 말이 나오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언니를 잃고 가장 컸던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공포였다. “엄마도 죽고 언니도 죽고, 이제 내 차례인가 보다. 나 죽으면 어떡하지.” 이 두려움은 이후 심리검사를 할 때마다 나왔다.
언니가 떠나고 2주 뒤, 세라는 경산시정신건강복지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은 금방 시작됐고, 매주 센터를 찾았다. 그 무렵 ‘동료지원활동가’라는 제도를 처음 알게 됐다. 자살로 가족을 잃은 사람이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을 돕는 일이라고 했다. 세라는 그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고 싶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사별한 지 2년이 지나야 지원할 수 있고, 사회복지나 상담 자격이 있으면 좋다고 했다. 세라는 기다리는 동안 사회복지사 자격 과정을 시작했고, 상담심리도 공부한다. “당사자성과 전문가성을 겸비하고 싶어서요.” 주변에서는 말렸다. 세라도 안다. “사별하고 2년이 됐다고 남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큼 단단해진 사람은 많지 않아요.”
음악은 세라가 평생 해온 일이다. 반대하던 아버지를 설득하고, 작곡과 출신 절친을 붙여 음대 입시를 돕게 한 것은 언니였다. 1992년 경희대 작곡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실용음악 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재즈클럽과 방송 무대에서 건반을 쳤다. 2014년부터는 FNC엔터테인먼트 건반 트레이너로 일하며 엔플라잉의 이승협, FT아일랜드의 송승현 등을 지도했다. 2021년 권성규와 결혼하며 나고 자란 서울을 떠나 경산으로 내려갔다.
언니를 잃은 뒤에도 일은 들어왔다. 드라마에 나올 배우의 건반 지도였다. 애도 중이라 못하겠다는 말은 프리랜서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일터는 자살 유족이라고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회사 앞에서 그는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나는 건반 트레이너다, 그걸 연기하자.’ 웃음기 없는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들어가 레슨을 했다.
2023년 11월, 경주에서 세계 자살유족의 날 기념행사가 열렸다. 경산에는 아직 자조모임이 없었고, 센터에서 상담받는 다른 유족들은 모르는 사람들 앞에 유족으로 앉기를 꺼려 가지 않았다. 세라는 실무자들 사이에 유족으로는 혼자였다. 그런데 서울에서 파견 온 동료지원가가 그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말로만 듣던 동료지원가를 처음 본 것이다. “와, 나 저거 진짜 해야지. 거기서 마음을 먹었어요.”
음악은 새로운 곳으로 세라를 이끌었다. 같은 달, 가수 친구가 서울시자살예방센터의 유족 모임 ‘자작나무’가 여는 세계 자살유족의 날 기념행사에서 노래를 한다고 했다. 세라는 따라갔다. “갔는데 너무 신기했어요. 다 유족이라는데 웃는 사람도 있고, 되게 밝은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오랫동안 ‘기념행사’로 불리던 이 행사는 기념이라는 말에 축하의 뜻이 담겨 맞지 않는다는 동료지원가들의 의견에 따라 지난해부터 ‘기억식’이 됐다. 올해 11월, 세라는 그 기억식 무대에 연주자로 선다.
그해 12월 세라는 자작나무 자조모임에 처음 나갔다. 경산에는 모임이 없었다. 처음 몇 달 세라는 눈이 커져 있었다. “별 얘기를 다 하는 거예요. 어디 가서도 못할 얘기들을요.” 장례식장에서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둘러댄 일, 자식에게도 말하지 못한 일, 위로랍시고 들은 ‘산 사람은 살아야지’가 얼마나 싫었는지 같은 것들이다. “이런 얘기도 하는구나, 해도 되는구나.” 언니는 속의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세라는 반대로 하기로 했다. “말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애도가 시작되거든요.”
첫 모임 여덟 달 만인 2024년 8월, 동료지원가가 참석하지 못한 어느 날 세라가 처음 진행 역할을 맡았다. 그는 “참석자일 때 힘을 받는 것과 진행자일 때 받는 것이 비슷한 크기로 저한테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에게는 충분히 공감하고 싶어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말이 있다. 세라의 애도 과정을 지켜본 사회복지사는 세라가 바로 그 말을 잘한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안다’ 같은 말이요. 그 순간 느끼는 마음을 그대로 건네니까, 상대는 ‘내 마음을 정말 이해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느끼는 것 같아요.”
언니와의 사별 2년을 넘긴 지난해 여름, 세라는 동료지원가 과정을 마쳤다. 지금은 자작나무 부대표로 서울에서 자조모임을 진행하고,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파견으로 경산 자조모임을 이끈다. 한국자살유족협회 이사로는 유족을 일대일로 만난다.
2024년 경산시정신건강복지센터에 생긴 자조모임 플라타너스는 화요일 오후 2시에 모인다. 해마다 3월 첫 모임에는 7명쯤 왔다가 하나둘 빠지고 세라를 포함해 두세 명이 남는다. 평일 낮이라 직장인은 참석이 어렵다. 평일 저녁에 하자는 요구도 많지만 센터 사정상 쉽지 않다.
서울도 다르지 않다. 25개 자치구 자조모임 중 주말이나 평일 저녁에 여는 곳은 8곳뿐이다. 전국으로 넓히면 227개 기초자치단체 중 68곳(30%)에는 아직 자조모임이 없고, 예산 회계연도 탓에 상당수 센터 모임은 11월이면 끝나 이듬해 3월에야 다시 열린다. “유족은 방학이 아니잖아요.” 세라의 말이다.
문제는 시간만이 아니다. “내 동네 센터를 내 발로 찾아가는 걸 꺼리시는 분들이 많아요. 아는 사람 볼까 봐. 경북이 특히 심해요. 정말 수치스러워하고 창피해하세요.” 같은 센터에 다니는 유족끼리 동네 시장에서 마주치면 눈인사만 하고 지나간다고 했다. 그래서 유족들은 숨어 있는 유족을 발굴한다는 표현을 쓴다.
경산에서 서울까지는 편도 약 300㎞, KTX로도 2시간 넘게 걸린다. 그 길을 거의 매주 오가는 아내를 두고 성규는 “오랜 이동에 지치고, 편히 쉴 거처도 마땅치 않아 늘 걱정”이라고 했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시골이라 아내에게 전기자전거를 사 준 것도 그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돌봤으면 좋겠어요.”
2024년 한 해 형제자매 모임을 다닌 세라는 이듬해부터 자녀 모임에도 나갔다. 언니를 애도하다 보니 쉰 해 가까이 미뤄 둔 애도가 남아 있었다. 어머니였다. 기억이 없으니 흔적부터 찾아야 했다. 자녀 모임에서 천주교 유아세례 기록은 주민등록등본처럼 남는다는 말을 듣고 기록을 뗐다. 어머니 이름과 자기 이름이 나란히 적힌 문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도 유족이었다. 1970년대에 아내를 자살로 잃고 어린 두 딸과 남은 남자였다. 세라는 자조모임에서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을 만나고서야 그 아버지를 처음 헤아렸다. “기성세대 남성은 자기 얘기를 안 하잖아요. 속이 문드러졌을 것 같은 거예요.” 아버지는 2018년 8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7월 세라는 고인의 삶과 죽음을 유족 면담으로 되짚는 심리부검을 받았다. 무서워 미뤄 온 일이었다. 자신의 애도 과정을 지켜봐 온 서울시자살예방센터 실무자 둘과 네 시간 동안 언니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했다. 그래서 좋았고, 같은 이유로 힘들었다고 했다. 언니를 한 번에 다 꺼내 놓은 여파는 한 달 뒤 인터뷰 때까지 남아 있었다.
세라는 상담심리를 공부하는 학교의 상담센터에서 지금도 상담을 받는다. 다음은 내 차례라는 공포가 풀린 것도 그 방에서였다. 열 번 넘게 그를 만나 온 상담사가 어느 날 작정한 듯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세라의 걱정은 근거가 없다고 했다. 명상하고, 운동하고, 약을 챙겨 먹고, 상담을 받고, 자조모임까지 하러 다니며 자신을 돌보는 사람은 그럴 수 없다고. 왜 근거 없는 두려움을 갖고 있냐고. 세라는 반박했지만 반박을 하면 할수록 자기 말이 맞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 알게 됐다. “나는 그만한 힘이 있는 사람이구나.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했나 보다.”
영어권에서는 자살 유족을 ‘생존자(survivor)’라고 부른다. “진짜 자살 생존자인 것 같아요. 너무 고돼요, 이 여정이.” 언니를 잃은 뒤로 세라는 늘 모자란 느낌으로 산다. “언니가 죽기 전엔 에너지 90%로 살았다면, 그 뒤로는 휴대전화 배터리 나간 것처럼 70%로 사는 느낌이에요.” 그 70%로 제한시간을 넘기고도 끝까지 달렸고, 상담과 약을 거르지 않는다. 자연사가 목표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세라에게는 아직 못 본 영상이 하나 있다. 결혼식 영상이다. 5년 전 그 결혼식에서 혼주석을 지킨 사람은 언니와 형부였다. 그래서 결혼 앨범도, 영상도 마주하지 못한다. 세라는 그게 늘 남편에게 미안하다. 남편도 그 영상 얘기를 했다.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순 없겠지만, 맥주 한잔하면서 결혼식 영상을 웃으면서 볼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세라도 같은 바람을 말했다. “올해는 같이 볼 수 있었으면 해요.” 결혼기념일은 두 달 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