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서울의 한 경찰서 앞. 다섯 살 여자아이가 버려졌다. 영어는 한마디도 못 했고, 가진 것이라곤 여벌 신발 한 켤레가 든 작은 가방뿐이었다. 그 아이는 40년 뒤 미국 프로스포츠 구단을 소유한 여성 구단주가 됐다.
그리고 올해 9월, 그의 딸이 US오픈 4강에 진출했다.
딸의 이름은 제시카 페굴라(32). 세계랭킹 3위의 미국 테니스 선수이자 억만장자의 딸이다.
억만장자 아버지, 서울 고아원 출신 어머니
아버지 테리 페굴라는 석유·가스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미식축구(NFL) 버펄로 빌스와 프로아이스하키(NHL) 버펄로 세이버스를 소유하고 있다. 재산은 포브스 기준 118억 달러(약 16조원)에 이른다.
어머니 김 페굴라의 출발은 달랐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경찰서 앞에 버려진 뒤 고아원에서 지냈고, 1974년 미국 뉴욕주의 한 부부에게 입양됐다. 낯선 나라에 온 그는 한동안 옷장과 신발 속에 먹을 것을 숨겨 두곤 했다. 배고팠던 시절이 남긴 흔적이었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 식당에 웨이트리스로 지원했다가 손님이던 테리를 만나 1993년 결혼했다.
이후 테리와 김 페굴라 부부는 2014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을 제치고 14억 달러(약 2조원)에 버펄로 빌스를 인수하는 등 프로스포츠 구단주로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서 김은 2018년 NFL과 NHL 두 구단 사장을 동시에 맡은 첫 여성이 됐다.
부모의 성공 속에서 자란 제시카는 정작 ‘금수저’ 이미지를 한사코 밀어낸다.
“사람들은 내가 집사를 두고 리무진을 타고 전용기로 이동하는 줄 안다. 난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알지도 못한다.”
제시카는 자신이 누린 특권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나는 반이 한국인”…서울에서 들어 올린 우승컵
2023년 10월, 서울 올림픽공원 테니스코트. 제시카가 결승 코트에 섰다. 어머니가 태어난 도시, 어머니가 버려졌던 그 도시였다. 7000여 관중이 그를 향해 응원을 보냈다. 마지막 포인트가 끝나자 제시카는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코리아오픈 우승이었다.
우승이 확정되자 제시카는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한 뒤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대회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나는 반이 한국인이다. 한국 팬들의 응원에 압도됐다”고 적었다.
한국에서의 우승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2019년 제시카가 이 대회에 처음 출전하면서 어머니도 동행했다. 입양된 뒤 한 번도 서울에 돌아온 적 없던 어머니는 이때 처음으로 자신이 자란 고아원을 찾았다. 가족은 그곳에서 미국으로 입양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 모두가 처음으로 어머니의 과거와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러던 2022년 어머니가 심정지로 쓰러졌다. 목숨은 건졌지만 뇌 손상으로 언어와 기억에 어려움을 겪었고 긴 재활에 들어갔다. 그 일을 겪은 뒤 제시카에게 서울 우승은 더욱 특별한 목표가 됐다.
억만장자의 딸 아닌 테니스 스타로
서른을 넘긴 뒤에도 제시카의 전성기는 이어지고 있다. 올해 US오픈에서도 4강까지 오르며 3년 연속 준결승 무대를 밟았다.
11일 준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또 사발렌카였다. 1세트 5-5까지 팽팽하게 맞섰지만, 한 번 흐름을 내주자 경기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2024년 결승, 지난해 4강에 이어 올해까지 3년 연속 같은 상대에게 가로막혔다. 메이저 첫 우승은 다시 뒤로 미뤄졌다.
하지만 제시카는 이 라이벌 구도를 원망하지 않는다. 준결승을 앞두고 그는 “사발렌카가 나를 더 나은 선수로 만들었다”고 했다.
‘억만장자의 딸’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