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불화하는 인간의 본성을 파고든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1911∼1983)의 대표작 ‘유리동물원’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나란히 10월 무대에서 관객을 만난다. 가족과 개인의 충돌,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고전이다. 우리나라 연극사에서는 1955년 극단 신협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초연했고 ‘유리동물원’은 1957년 연희극예술연구회가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공연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올해는 마포문화재단과 극단 툇마루가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예술의전당이 17일부터 11월 22일까지 CJ토월극장에서 ‘유리동물원’을 선보인다.
◆현실과 불화하는 인간을 품은 극작가
20세기 미국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 윌리엄스는 ‘유리동물원’으로 이름을 알린 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로 각각 1948년과 1955년 퓰리처상 희곡 부문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에는 쇠락한 미국 남부와 불안정한 가족 관계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성적 욕망과 외로움도 삶을 뒤흔든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인물들은 환상과 기억에 의지해 자신을 지키려 하지만 세상은 좀처럼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어머니는 과거의 영광에 매달리고 여성은 사랑받기를 갈망한다. 청년은 다른 삶을 꿈꾸지만 현실과 타협하는 데 서툴다.
이들이 단순히 나약한 피해자로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 윌리엄스 희곡의 힘이다. 상처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의존한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섭과 억압으로 바뀌기도 한다. 어느 한쪽을 옳고 그름으로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인물들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무대에서 새롭게 해석됐다. 가족 부양과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흔들리는 삶이나 폭력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이 불러일으키는 공감도 시대불변이다.
◆‘유리동물원’… 깨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
1944년 시카고에서 초연된 뒤 이듬해 브로드웨이에서 성공을 거둔 ‘유리동물원’은 윌리엄스에게 큰 명성을 안긴 작품이다. 가족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말과 침묵으로 인물들 균열을 드러내는 조용한 비극이다.
무대는 1930년대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허름한 아파트다. 남편이 떠난 뒤 두 자녀를 키우는 아만다는 화려했던 젊은 시절에 기대어 산다. 딸 로라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작은 유리 동물 조각을 벗 삼아 시간을 보낸다. 구두 창고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아들 톰은 자유로운 시인의 삶을 꿈꾼다. 아만다가 로라를 결혼시키려고 톰의 직장 동료 짐을 초대하면서 이들이 붙들고 있던 희망과 환상이 흔들린다.
작품은 톰이 과거를 회상하는 ‘기억극’ 형식으로 전개된다. 무대에 펼쳐지는 사건은 객관적인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톰의 기억을 거쳐 되살아난 풍경이다. 사실적인 가족 이야기에 음악과 조명 등 시적인 표현이 겹쳐지는 이유다. 그 중심에는 ‘떠나는 사람의 죄책감’이 있다. 톰은 가족을 떠나야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지만 떠난 뒤에도 로라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집을 벗어나도 해방되지 못하는 삶이다.
연출을 맡은 신유청은 지난 8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을 인터넷 접속에 빗댔다. 그는 “어느 공간에서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지 않나. 작품 속 상징들을 읽어가다 보니 이 작가는 한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한 집안의 이야기 속에 당시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통용되는 인류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신유청은 아만다를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너무 오래된 지도밖에 없는 사람”으로 해석했다.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주고 싶어도 자신이 아는 낡은 방식밖에 건넬 수 없는 어머니다. 톰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떠나지도 제대로 머물지도 못하는 인물”로 바라봤다. 로라에 대해서는 극이 결말로 향할수록 “로라의 존재와 그가 꿈꾼 세계가 작품의 핵심으로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아만다 역은 김성령과 최정원이 나눠 맡는다. 김성령은 이번 공연이 자신의 여덟 번째 연극이라며 “무대에 설 때 가장 두렵고 불안하지만 그만큼 불안을 깨고 도전하고 싶은 곳이 무대”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출연한 연극 가운데 배우가 가장 많고 규모도 가장 크다”며 “연습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충만하고 행복하게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같은 역을 맡은 최정원은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작품이 우울하게 느껴졌지만 파고들수록 희망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몸에 난 상처를 다른 사람이 상처라고 해도 예쁜 액세서리라며 감추려 하지만 마지막에는 그것이 상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치료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아만다 역시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과 딸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최정원은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희망처럼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톰 역에는 장승조·권율·김경남이 출연한다. 장승조는 톰을 “살아가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인물”로 봤다. 그는 “누군가에게는 별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연민이 생긴다”며 “톰을 보면서 갈 길을 정하지 못한 채 맨땅에 몸을 내던지던 20대와 30대의 나를 마주했다”고 말했다. 이어 “관객도 각 인물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며 이것이 작품이 꾸준히 공연되는 이유라고 짚었다.
로라 역은 정운선·정새별·임세미가 맡는다. 정운선은 2014년과 2015년 명동예술극장 공연에 이어 11년 만에 로라로 돌아온다. 그는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그때의 나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대본을 다시 읽으면서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했다. 정운선은 “10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르듯 같은 것도 다르게 느껴졌다”며 “그 점이 흥미로워 다시 작업하게 됐다”고 말했다. 방문객 짐 역에는 문유강·배훈·최정우가 캐스팅됐다.
무대는 박상봉 무대디자이너가 맡는다. 무대미술을 ‘시각적 극작법’으로 바라보는 그는 인물의 심리와 관계를 공간으로 풀어내고 배우의 움직임과 관객의 상상을 이끄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에는 톰의 기억과 죄책감이 밴 집을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 신 연출은 작품을 읽으며 성화 같은 한 폭의 그림을 떠올렸다며 “무대도 한 폭의 그림 같았으면 좋겠어서 소실점을 중심으로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비극의 끝에서는 희망을 찾는다. 신유청은 “비참한 고난과 큰 상처 속에서도 결국 깨진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싹이 튼다”며 “모든 것이 사라진 가운데서도 사랑이라는 싹이 틔어 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으로 극을 닫고 싶다”고 말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스탠리의 폭력에 던지는 질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1947년 초연된 뒤 세계적 극작가로서 윌리엄스의 위상을 굳힌 작품이다. 명배우 말론 브란도를 상징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엘리아 카잔이 연출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던 브란도는 1951년 영화에서도 비비언 리와 함께 출연했다.
뉴올리언스에 사는 스탠리와 스텔라 부부의 집에 스텔라의 언니 블랑쉬가 찾아오면서 극은 시작된다. 몰락한 남부 명문가 출신인 블랑쉬는 과거의 화려함과 교양으로 상처와 비밀을 가린다. 거칠고 현실적인 폴란드계 노동자 스탠리는 그의 과거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스텔라는 언니에 대한 연민과 남편을 향한 욕망 사이에 놓인다. 스탠리의 친구 미치에게서 새 삶을 기대하던 블랑쉬는 결국 파국으로 내몰린다.
이 작품은 언어와 육체가 맞부딪치는 격렬한 심리극이다. 블랑쉬와 스탠리의 충돌은 쇠락한 남부 귀족사회와 새로운 노동계급의 대립을 드러낸다. 동시에 환상과 현실의 싸움이며 욕망이 타인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바뀌는 과정이기도 하다. 누구를 중심에 놓느냐에 따라 상처받은 여성이 파괴되는 비극이 되기도 하고 폭력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의 선택이 부각되기도 한다. 시적인 언어와 사실적인 심리 묘사를 함께 소화해야 하기에 배우라면 한 번쯤 도전하고 싶어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마포문화재단과 극단 툇마루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블랑쉬를 무너뜨리는 스탠리에게 시선을 돌린다. 조금희 연출은 지난달 20일 제작발표회에서 스탠리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짚으며 “우리 사회에서 이런 것들이 과연 정당한가를 한 번쯤 생각해보도록 했다”고 말했다. 소외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를 스탠리에게 겹쳐 보면서 블랑쉬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과정을 그리겠다는 설명이다.
원작의 심리극에는 표현주의적 장치를 더한다. 블랑쉬의 독백에는 무용수의 그림자를 겹치고 인물들의 감정 변화에는 색소폰 음악을 활용해 내면을 드러낼 계획이다.
스탠리는 송일국이 연기한다. 친근하고 영웅적인 이미지로 알려진 그에게는 익숙한 모습을 벗어나는 도전이다. 그는 자신의 성격과 정반대인 인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쉽지 않다면서 “무대에서 관객들이 ‘저 사람이 송일국이었지’라는 것을 잊게 만드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블랑쉬 역의 송선미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자신과 달리 배역은 늘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연출이 요구하는 날카로운 인물을 만들기 위해 연습하고 있다며 무대에서 “온전히 연기로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연극 무대에 처음 도전하는 사강은 스텔라를 맡는다. 그는 언니와 남편 사이에 놓인 스텔라에게도 자신의 욕망이 있다며 작품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해석했다. 관객도 스텔라의 선택을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보기를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