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미·중 경쟁의 구조화와 한국의 다중 정렬 전략

미·중 경쟁의 핵심은 기술·공급망 통제력
양자택일 아닌 한국식 ‘다중 정렬’ 전략 필요

미·중 관계는 정상회담과 고위급 대화를 앞두고 외교적 접촉이 확대되고 있지만, 경쟁의 구조적 성격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양국은 기술·안보·산업정책을 중심으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으며, 글로벌 공급망과 첨단산업 전반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 25일 베이징에서 열린 미·중 1.5트랙 대화에서는 정치·경제·기술 협력이 논의됐지만, 최근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는 공동성명이 무산되며 양측의 입장 차가 다시 확인됐다. 오는 24일 워싱턴에서 열릴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큰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오늘날 미·중 경쟁은 과거의 군사·영토 중심 경쟁과 성격이 다르다. 미국은 오랜 기간 세계 경제를 자국 중심의 금융·생산·디지털 네트워크로 통합해 왔고, 중국은 초기에는 이 네트워크에 편입되며 저임금 노동력과 제조 역량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미국 중심 질서에 기여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중국은 기술 자립과 전략산업 육성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첨단 제조업과 국가안보가 결합된 산업정책을 강화하고, 달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무역·금융 전략도 병행했다.

 

이 과정에서 금융·인프라·생산 시스템 등 초국경 네트워크의 통제력이 경쟁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글로벌화 과정에서 분리됐던 네트워크들은 다시 결합되며 장기적 종속 구조를 형성하고 있고, 양국은 이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동시에 여러 국가가 미국과 중국의 네트워크에 동시에 연결되는 ‘다중 정렬(Poly‑aligned)’ 상태가 나타나고 있다.

고영진 하버드대학교 페어뱅크센터 방문교수·성균관대학교 부교수

한국은 대표적인 다중 정렬 국가다. 미국의 안보·기술 규범 네트워크와 중국의 생산·시장 네트워크에 동시에 깊이 연결돼 있다. 미국은 기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도체·배터리·AI 등 전략산업을 중심으로 규제와 보조금을 결합한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첨단 기술 이전 제한, 해외 투자 심사 강화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기술 부상은 미국에게 구조적 위협으로 해석되며, 이는 규제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은 기술 자립과 공급망 안정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내수 중심 성장 전략과 국유기업 중심 산업정책을 확대하며, AI 인프라와 생산 네트워크를 국가 주도로 관리하고 있다. 미국의 규제 강화는 중국의 산업정책을 더욱 국가 중심으로 전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다중 정렬 상태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딜레마를 가장 잘 보여준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중국 시안·우시·다롄에 대규모 생산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중국은 한국 반도체 수출의 최대 시장이다. 미국의 수출통제는 한국 기업의 중국 내 생산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2026년부터 미국은 중국 내 한국 공장에 대한 장비 반입을 연례 승인 체제로 전환해 불확실성을 높였다. 한국 기업은 미국의 규제 준수와 중국 시장 의존 사이에서 복합적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한국은 미국·중국과 각각 공급망 협력을 확대하며 기술·안보·경제를 결합한 대응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희토류·배터리 소재 등 핵심 광물 확보는 중국과의 협력 필요성을 강화하는 요소다. 동시에 한국은 미국의 대중 기술 규범을 일정 부분 수용하며 안보 동맹의 신뢰를 유지해야 한다.

 

한국의 전략적 선택은 단순한 양자택일이 아니다. 미국의 규범을 따르면서도 중국 시장과 생산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다중 정렬 전략이 필요하다. 다중 정렬 국가로서 한국은 어느 한쪽의 종속을 피하고, 다자적·다층적 연결을 통해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미·중 경쟁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중요한 것은 경쟁의 강도가 아니라 경쟁의 구조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이다. 기술·안보·산업정책이 결합된 기술국가주의(Techno-nationalism) 경쟁 구도 속에서 한국은 전략산업의 재편과 공급망의 지역화라는 새로운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대응해야 한다. 한국의 선택은 단순한 외교적 줄타기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산업 전략을 좌우하는 구조적 문제다.

 

고영진 하버드대학교 페어뱅크센터 방문교수·성균관대학교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