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전 일본 도쿄 시부야구 도큐플라자.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나 혼자만 레벨업’(나혼렙) 전시를 관람한 고지마 지아키 씨는 상기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소 좋아하던 캐릭터를 “실물로” 만날 수 있었던 데다 굿즈까지 단단히 챙겼으니 얼마나 뿌듯했을까요.
‘캐릭터 왕국’ 일본에서 이런 종류의 전시회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혼렙 전시는 얘기가 좀 다릅니다. 10년 전 웹소설에서 출발해 2018년 이후 웹툰으로 재탄생한, 한국 창작물이라는 점에서입니다.
나혼렙 전시는 지난해 11월 DUEX 홍대 1관에서 처음 열렸는데, 이제 ‘만화 강국’ 일본에까지 진출해 현지 팬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이죠.
‘E랭크에서 레벨업’ 체험형 전시
전시 관람은 입장권(평일 성인 3300엔·약 3만원)을 구입해 일본헌터협회 트레이닝센터 수강증에 E랭크 도장을 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최약체 헌터였던 주인공 성진우가 이중 던전 사건을 거쳐 각성한 후 이그리트, 베르 등을 만나며 최강 헌터로 거듭나는 과정을 관객들이 그대로 따라가는 형식입니다.
전시는 단순히 원화 스케치를 갤러리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각 존마다 투명 모니터 상태창을 통해 메시지가 전달된다든지, 카르테논신전과 개미굴 등 작품 속 공간이 눈 앞에서 펼쳐진다든지 하는 ‘몰입형 체험’ 형식으로 꾸며졌습니다. 퀴즈 풀이 등 문제를 해결해야 다음 존으로 이동 가능한 방식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주요 등장인물들의 대형 피규어와 파노라마 형태의 스페셜 영상, 철제로 제작된 실제 사이즈 무기 등 풍부한 전시물이 눈을 즐겁게 했습니다.
그림자 군단 존에서는 전시 관계자 안내에 따라 다른 관객들과 함께 “오키로”(‘일어나라’는 뜻의 일본어)를 외쳐 이그리트, 아이언, 탱크 등을 깨우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6단계 훈련 인증을 받고 난 뒤에는 새로운 헌터 등급을 부여받으면서 전시장을 나서게 됩니다. 무슨 등급을 받을 수 있는지는 일본의 확률형 캡슐 뽑기, 가차로 결정됩니다. 그 뒤로는 티셔츠, 포토카드 등 40여 종류의 특별 굿즈를 살 수 있는 매장이 나옵니다.
‘나혼렙’ 전시 18번 찾은 이탈리아 청년
이곳 전시장에선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현지 주최사인 모트익스피리언스의 송선욱 대표는 “내국인과 외국인 관람객 비중은 65 대 35 정도”라며 “특히 서구권 관람객의 전시 만족도와 굿즈 구매 금액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일부러 도쿄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있다고 합니다.
그 중 한 명이 2022년부터 일본에서 유학 중인 이탈리아인 안드레아(32)였습니다. 나혼렙이 너무 좋아 이곳을 18번이나 찾았다는 그와 대화를 나눠 봤습니다.
― 이 전시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나.
“나혼렙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애니메이션이라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전시장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만화와 똑같은 세계를 구현하고 있어 몇 번이나 감동했다. 베르 같은 캐릭터들이 만화에서 본 것과 동일하게, 그리고 커다랗게 만들어진 점이 멋있다.”
― 언제 처음 전시를 봤나.
“올해 4월에 한국에서 하는 전시를 봤다. 사람들과 같이 (그림자 군단을 향해) ‘일어나’를 외치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5월에 도쿄에서도 전시를 하게 됐다는 뉴스를 보고 정말 기뻤다.”
― 굿즈는 어떤 것이 마음에 드나.
“다 샀는데, 도쿄 박스가 좋다. 후드티도 마음에 들고. 조금 비싸긴 하지만, 이걸 사려고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이 티셔츠도 한국에서 산 것이다.”
― 나혼렙을 처음 접한 계기는 만화였나 애니였나.
“2020년 독일어판 만화를 처음 읽게 됐고, 그 뒤로는 웹툰으로 쭉 봤다. 나혼렙은 유럽에서도 대단한 인기다.”
― 어떤 점에 그렇게 빠져들었나.
“카르테논신전의 거대 신상 얼굴 그림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재미있어 보여 처음부터 읽었고 금방 빠져들게 됐다. 만화, 애니 다 좋지만 역시 만화가 더 좋다. 그림이 더 아름답고 색감도 더 좋다. 만화의 컷 방식, 웹툰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보는 게 더 재미있는 것 같다.”
‘나혼렙’ IP, 드래곤볼·마블 반열 오를 수 있을까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4년 국내 콘텐츠 지식재산권(IP) 산업 매출액은 약 47조7427억원으로 전체 콘텐츠 산업(162조8000억원)의 29.3%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자체 IP 확장은 14.2%에 그쳤고, 외부 IP를 가져다가 2차 저작물을 제작하는 ‘타사 IP 활용’(49.9%)과 ‘단순 라이선스 거래’(35.9%)가 대부분이었죠.
반면 일본은 IP 하나를 수십 년에 걸쳐 확장하는 구조이죠. 포켓몬, 건담, 드래곤볼, 원피스 등의 만화가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완구, 굿즈, 전시·테마파크, 후속편으로 이어집니다. 영상 콘텐츠의 흥행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해당 캐릭터와 세계관이 끊임없이 확장하며 새로운 수익을 창출해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나혼렙은 한국 IP의 진화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전시 주최 측에 따르면 나혼렙은 웹툰이 글로벌 시장에서 누적 조회수 143억뷰를 기록했고, 11개국에서는 웹툰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같은 세계적 인기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 게임, 넷플릭스 실사 드라마 등으로 무한 확장 중입니다.
나혼렙은 지금껏 K콘텐츠의 수출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한국에서 탄생한 웹소설·웹툰 IP가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고, 이를 통해 더욱 커진 글로벌 팬덤이 다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모트익스피리언스 측은 “한국의 우수 IP 창작 능력에 일본의 애니 제작 역량이 더해져 세계적 인기 애니가 탄생한 것”이라며 “최근 ‘전지적 독자 시점’도 일본 제작사와 애니 제작을 준비하는 것에서 보듯 각국의 역량이 결합된 ‘아시아 콘텐츠’가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도쿄비즈니스센터는 “최근 한·일 콘텐츠 산업은 단순 수출·유통을 넘어 공동 제작, IP 공동 개발 등 연계가 빠르게 확대되는 추세”라고 설명했습니다. 드라마 분야에서는 ‘로맨틱 어나니머스’, ‘소울메이트’, ‘가스인간’ 등 한·일 합작이 이미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나혼렙은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을까요. 일단 체험형 전시는 앞으로 오사카, 요코하마로 이어지고 대만, 홍콩 등 아시아는 물론 미주, 유럽으로 확장해 나갈 계획이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