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통일된 아일랜드를 보고 싶다”고 말해 영국이 그 진의(眞義) 파악을 놓고 부심하는 모습이다. 영국 영토인 그레이트브리튼 섬과 가까운 아일랜드 섬은 독립국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北)아일랜드로 나뉘어져 있다. 과거 영국의 식민 지배에 비판적인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둘이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영국은 “북아일랜드 주민들 의사가 중요하다”며 이를 경계하는 입장이다.
12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전날 미국을 출발한 트럼프는 이날 아침 일찍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 도착했다. 아일랜드 서부 둔베그에 자신의 이름을 딴 골프장을 갖고 있는 트럼프는 13일 그곳에서 열리는 아이리시 오픈 골프 대회 참관을 위해 이틀 일정으로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트럼프는 미할 마틴 아일랜드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언젠가 아일랜드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며, 총리께서 그 일을 추진하기에 적임자”라고 말했다. 이어 “아일랜드 통일은 환상적인 일이 될 것”이라며 “이제 영국도 분명히 이에 대해 할 말이 있을 텐데, 나는 그것이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마틴 총리는 신중한 반응을 보이며 동의 여부 등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아일랜드는 수백년간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20세기 들어 가까스로 독립하긴 했으나 친(親)영국 성향의 주민이 많은 섬의 북부 지역은 영국에 잔류하는 길을 택했다. 이에 섬 전체의 통일을 요구하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조직한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란 무장 단체가 영국인들을 겨냥한 테러에 나서며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결국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아일랜드, 북아일랜드, 영국 3자 간에 벨파스트 협정이 체결됐다. ‘성금요일(Good Friday) 협정’으로도 불리는 이 합의는 크게 △아일랜드·북아일랜드 간 주민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 △북아일랜드의 자치권 확대 △필요시 북아일랜드 주민 투표에 의한 통일 여부 결정 세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트럼프의 발언 내용이 알려진 뒤 영국 총리실은 앤디 버넘 신임 총리가 최근 “영국은 성금요일 협정을 100% 지킬 것”이라고 말한 점을 강조했다. 버넘 총리는 “주민 투표 실시는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수반에게 달려 있다”면서도 “그 시점은 주민들 사이에 명확한 합의가 있다고 여겨질 만큼 여론이 변했을 때”라는 단서를 달았다.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니다’는 의중을 내비친 셈이다.
이날 트럼프는 캐서린 코놀리 아일랜드 대통령과도 회동했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아일랜드 정부의 실권은 총리에게 있고,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의례적·상징적 역할만 수행한다.
진보 성향의 코놀리 대통령은 트럼프와의 대화 도중 19세기 대기근, 영국의 오랜 식민 지배, IRA 활동기의 분쟁과 폭력 등 아일랜드가 겪은 역사적 시련을 들어 “우리는 평화로 가는 길이 길고 험난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나라”라고 설명했다. 이어 “전쟁과 집단학살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당부했다. 미국의 이란 전쟁, 중동 가자 지구에서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을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