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살까, 그 걱정부터 들더라고요.”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아들 김보성(28)씨를 키우는 박미경(56)씨는 자궁내막암 판정을 받고 2018년 수술대 위에서 아들의 앞날을 다시 고민하게 됐다. ‘아직 내가 젊으니까’라며 미뤘던 ‘내가 없는 아들의 삶’이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었다. “발견이 늦었다”는 의사의 말에도 항암 치료를 무사히 마쳤지만, 보성씨 자립 준비가 만만치 않았다. ‘바리스타를 하고 싶다’는 말에 카페를 차렸지만 음료 제조 말고 다른 일을 아들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에게 ‘자립’은 평생의 숙제이자 오지 않았으면 하는 미래다.
대전 행복한우리복지관 이혜정 부장은 “복지관이 생기고 찾아온 청년들이 20대를 지나 30대, 40대가 되어간다. 장애자녀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거나, 요양원에 들어갔다면 돌봄 공백은 생기게 되고, 우리 복지관에도 큰 숙제였다”며 “단순 돌봄 대신 지역사회 안에서 실제로 청년들이 자립할 수 있을 실질적인 교육과 시스템이 절실했다”고 설명했다.
행복한우리복지관이 발달장애자녀 자립을 위해 평생설계 지원사업을 시작한 건 2023년이다.
복지관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열매) 지원을 통해 재정, 법률, 주거, 건강 등 생애주기별 8가지 분야에서 부모∙자녀가 함께 수강토록 했다. 실제 장애자녀가 있는 가정 눈높이에도 내용을 맞췄다. 지적장애가 있는 김지윤(32)씨의 어머니 유원자(60)씨는 “교육을 받기 전까진 막연히 ‘돈을 많이 모아서 물려주면 되겠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재정 컨설팅을 받아보니 내가 없어도 돈을 안전하게 쓸 수 있게 신탁 등을 해두는 게 훨씬 중요했다”고 전했다.
프로그램을 3년간 진행한 결과 참여 12가정 중 자녀 3명이 집을 얻고 주거자립을 실현했다. 취업에 성공한 이들도 7명이다. 복지관은 올해부턴 사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발달장애인 자립모델 구축사업으로 확장하고 있다.
자립한 이들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아파트에서 따로 생활하고, 남은 사흘만 가족과 지낸다. 자립 청년들은 낮에 직장에서 근무한 후 복지관에서 요리, 가계부 등 오후 수업을 듣고, 귀가 후엔 대학생 주거코치를 통해 가사 도움을 받는다. 밤엔 지역 봉사단체가 다니며 집집마다 불은 꺼졌는지, 식사나 건강 문제는 없는지 확인한다.
부모들을 놀라게 한 건 자립에 대한 자녀들의 의지다.
유씨는 딸 지윤씨가 분가 후 ‘왜 자꾸 우리집에 오려고 해?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말해 놀랐다며 “내가 아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홈캠 너머로 자취방에서 혼자 발을 구르며 좋아하는 지윤이를 보며 딸에게도 자기 공간이 필요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고 말했다. 부모들은 ‘우리 아이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자고 독려했다. 유씨는 “처음엔 ‘설마 쟤네들이 하겠어? 못 할 거야’ 했던 분들이 80% 이상이었을 것”이라며 “그런데 한두 달 지나고 아이들이 너무 잘해내니 지금은 ‘우리 아이도 해봐야겠다’며 다들 준비하고 있다”고 미소 지었다.
비장애 가족의 ‘독박’이었던 돌봄 부담도 자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크게 옅어졌다. 지역사회와 분담하는 건 물론 자조모임 등을 통해 장애가정 간 네트워크가 단단해진 덕분이다. 지적장애 청년 김수종(34)씨의 어머니 서애화(63)씨는 “이전까진 비장애 자녀에게 ‘네 삶을 살아라’고 말은 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그래도 네가 좀 봐주겠지’ 하는 무언의 부담감을 줬던 것 같다”며 “그런데 아이가 실제로 자립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비장애 자녀도 ‘내가 데리고 살지는 못해도 한 달에 한두 번 체크하며 지켜봐 줄 수는 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박씨는 “우리 남편은 10년 넘게 복지관에 발도 안 들이던 사람이다. 나이 먹으면 농사 지으면서 보성이를 데리고 살면 된다고 하더니, 내가 암에 걸렸을 때 현실을 직시했다”며 “복지관 프로그램인 가족캠프를 같이 가자고 하니 일하는 새벽에 캠프장을 찾을 정도로 달라졌다”고 했다. 또 “비장애인인 큰애도 이전엔 동생 프로그램에 한 번도 안 왔다. 이번엔 ‘자립은 동생을 위해 반드시 준비해야 할 일’이라며 곧 진행하는 형제 캠프에는 꼭 참여하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민간 차원에서 실험엔 성공했지만, 지속 가능한 ‘진짜’ 자립이 되려면 정부∙지자체의 힘이 필요하다.
이 부장은 “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자원은 결국 ‘사람’이다. 청년 곁을 지켜줄 사람들이 지역에 얼마나 촘촘한지가 지속 가능성을 결정한다”며 “단순히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거코치 확보, 야간 돌봄 안전망 구축 등을 시스템이 함께 뒷받침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