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한국인 탈무드] 호르무즈 딜레마와 세종의 외치

명나라 요구에 가용 전력·주변 정세부터 확인
대신들 의견 모아 여러 가능성 대비 위기 돌파

세종이 재위 말년에 직면한 가장 큰 외교적 위기는 명나라의 10만명 파병 요구였다. 1449년, 몽골 오이라트부 에센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명나라 영종 황제는 군사 7만명을 이끌고 친정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도 칙서(勅書)를 보냈다. 오이라트군이 장차 조선의 변방까지 노략질할 것이니, “정병 10여만명을 동원하여 요동의 여러 장수와 협공해 적을 박멸하라”는 요구였다(세종실록 31년 9월9일).

칙서를 받은 세종은 먼저 “일이 병기(兵機)에 관계된다”며 이 사안을 비밀에 부쳤다. 소문이 퍼져 백성이 불안해하고 국정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왕세자가 명나라 사신을 정중히 접대하는 동안, 세종은 대신들과 대응책을 숙의했다. 그리고 열흘 뒤 한성부윤 김하를 북경에 급파해 파병이 어려운 이유를 정중하면서도 치밀하게 밝힌 주문(奏文)을 전달했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세종이 제시한 논리는 세 가지였다. 첫째, 조선이 처한 지정학적 위협이었다. 조선은 삼면의 왜구와 북방의 여진족을 동시에 경계해야 했다. 남북 변경을 지킬 군사마저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10만명을 국외로 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둘째, 명나라의 국익을 고려한 역발상의 논리를 폈다. 조선의 정예군이 요동으로 빠져나가면 왜구와 여진족이 그 틈을 타 침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명나라는 북쪽의 오이라트뿐 아니라 동쪽의 조선 국경까지 걱정해야 했다. 따라서 조선군이 국내에 남아 국경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명나라의 안보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득했다. 셋째, 거절에 그치지 않고 국경 자경(自警)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조선의 봉토를 굳게 지키고, 오이라트군이 국경을 침범하면 힘을 다해 물리치겠다고 밝혔다. 요동 파병은 어렵지만, 조선에 맡겨진 동쪽 방어는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파병 여부를 검토하는 과정도 주목할 만하다. 세종 정부가 파악한 전국의 동원 가능한 육군 병력은 약 16만명이었다(세종실록 31년 8월2일). 명나라가 요구한 10여만명은 조선의 주력 병력을 거의 모두 내보내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종은 요동에 첩자를 보내 전황의 실상도 탐지하게 했다. 명나라의 요구를 먼저 받아들이거나 거절한 뒤 근거를 찾은 것이 아니라, 가용 전력과 주변 정세를 확인한 다음 대응 논리를 세운 것이다.

세종이 강조한 원칙은 임사이구(臨事而懼), 곧 “지나치게 두려워해서 소란을 일으켜서도 안 되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 방비를 잊어서도 안 된다”는 태도다. 동시에 호모이성(好謀而成), 국가의 운명이 걸린 문제일수록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김하가 출발한 뒤 영종 황제가 오이라트군에 패해 포로가 되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어 황태후가 “신민에게 주군이 없을 수 없다”며 황제의 아우를 새 황제로 세웠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세종은 즉시 의정부와 육조의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진하(進賀)와 포로가 된 영종을 위로하는 진위(陳慰)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할지 여러 신하의 의견을 들었다. 집현전에는 관련된 역사적 전례와 예법을 조사하게 했다. 대신들의 경험과 집현전의 지식을 모아 최선의 방안을 찾은 것이다. 파병은 거절하되 명나라의 국가적 불행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외교적 신뢰도 지키려 했다.

결과적으로 명나라는 조선의 파병 거절을 문제 삼지 않았다. 다만 이를 조선 외교의 승리로만 보기는 어렵다. 황제가 포로가 되고 새 황제가 즉위하면서 전쟁 상황과 파병 요구의 전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종에게 배울 점은 파병했느냐 거절했느냐보다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있다. 세종은 정보를 감추어 독점하지도, 불확실한 정보를 성급히 공개해 혼란을 키우지도 않았다. 군사적 역량과 현지 상황을 확인하고, 대신들의 경험과 집현전의 지식을 모아 여러 가능성에 대비했다. 두려워하되 흔들리지 않고,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시행하라[從僉議施行]”며 협력을 끌어낸 것. 그것이 국가적 위기 앞에서 세종이 보여준 외교 리더십이었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