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의시대정신]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

與, 압도적 의석으로 입법 폭주
끝내 검사의 보완수사권 없애
감시·견제 무너지는 순간 불안
국민들의 호소 들리지 않는가

우연이 우연이 아닌 듯 생각을 어지럽힐 때가 있다. 얼마 전 예술의전당에서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는 제목의 전시를 보고 나오다, 무심코 연 온라인 기사에서 같은 문장을 마주쳤다. 최근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있는 유시민 작가가 지지자들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우리가 사람을 잘못 봤든, 제대로 봤지만 권력을 잡고 바뀌었든, 중요한 건 지금 모습”이라며, “우리가 이성의 끈을 놓치고 이성이 잠들게 하는 순간, 곧바로 괴물이 더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마침 이재명 대통령 지지율이 36%로 떨어져 취임 후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 문장은 18세기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판화 연작 ‘카프리초스’ 43번째 작품에 새겨져 있다. 책상에 엎드려 잠든 인물 주위로 부엉이와 박쥐 떼가 몰려드는 장면이다. 밤의 동물인 부엉이와 박쥐는 어둠과 불길함을 상징한다. 본래 고야는 왕실의 화려한 삶을 그리던 궁정화가였다. 그러나 원인 모를 병으로 청력을 잃고 침잠해 가던 그는 점차 권력의 위선과 시대의 어둠을 직시하게 된다. 화가가 벼려낸 ‘이성’은 성역과 미신을 깨뜨리는 계몽의 눈이었고, ‘괴물’은 성찰 잃은 사회를 집어삼킨 맹목과 광기였다.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목격했던 고야의 자각이 어쩌다 200년이 지난 우리 정치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걸까.

김동기 강원대 초빙교수·전 KBS PD

압도적 의석을 앞세워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입법 폭주. 그 속에서 스멀스멀 자라던 불안이 얼굴을 드러낸 건 8월 말 제주였다. 한 30대 여성의 실종 사건이 표면화되자, 사흘 동안 네 구의 시신이 제주에서 잇따라 발견됐다. 우리는 아름다운 바다, 푸른 야자 숲에 묻혀있던 비극에 심장이 내려앉았고, 경찰의 거짓과 무책임과 무능에 경악했다.



실종 신고 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경찰의 입만 바라보고 있던 가족에게 담당 경찰관은 “실종자와 연락이 되었으나 본인이 위치를 알리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거짓말이었다. 그리고는 실종 신고 두 시간 반 만에 ‘교통사고 사망’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단지 업무 태만이 아니다. 실종자 수색과 수사를 가로막은 행위다. 한 개인만의 일탈로 보기도 어렵다. 골든타임을 놓쳐 104일 만에 발견된 시신은 부패가 심해 사망 원인조차 밝히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런데 경찰은 시신이 발견되자마자 서둘러 “타살 가능성은 낮다”고 발표했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찰에게 수사 권한을 집중시키고, 검사의 보완수사권마저 없애는 지금의 입법 방향이 과연 옳은가.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제주 실종 사건의 허위 종결은 검찰의 보완수사권이 작동하는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현 입법과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 해명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낳는다. 보완수사권이 살아 있는 지금도 이러한데, 그 견제마저 사라진다면 경찰 권한의 오남용이나 수사 오류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문제는 경찰이냐 검찰이냐에 있지 않다. 감시와 견제가 무너지는 순간, 대가를 치르는 것은 결국 억울한 형사사건 피해자와 방치된 민생 안전이다.

지난 5월 광주. 귀가하던 17세 여고생을 무참히 살해한 장윤기 사건의 실체는 검찰의 보완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경찰은 애초 이 사건에 보통살인죄를 적용해 송치했지만, 검사가 수사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강간살인 혐의가 밝혀졌다. 둘 사이의 차이는 결코 가볍지 않다. 보통살인죄의 하한은 징역 5년, 강간살인죄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만을 선고할 수 있다. 배후에는 장윤기의 아버지가 현직 경찰 간부로서 직접 핵심 증거를 인멸했고, 수사팀장까지 이에 가담한 정황이 있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도 다르지 않다. 2022년 경찰은 중상해죄로 송치했지만,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재감정과 증거 검증이 이뤄지며 강간살인미수로 밝혀졌다. 현재 가해자는 구치소에서 피해자에게 보복을 예고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보완수사권 폐지에 반대하며 목소리를 내온 피해자를 두고, 9일 항소심 재판장이 “피해자도 재판 과정에서 상당한 언론 플레이가 있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의 호소마저 정치화하게 되었는가.

제주 실종 사건으로 폭발한 국민의 불안은 수많은 사례를 다시 길어 올리며 개정 입법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경찰 물고문으로 숨지고 조직적 은폐로 묻힐 뻔했으나 한 검사의 결단으로 진실 규명의 전환을 맞은 박종철 열사 사건도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검찰 권한 축소를 두고 이 대통령과 민주당은 “국민의 엄중한 명령이자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했다. 국민의 생각은 다르다. 9일 발표된 한길리서치 조사에서 국민이 꼽은 가장 잘못된 정책은 검찰 권한 축소(23.4%)였다. 부동산 정책(21.8%), 과도한 복지(7.9%), 민생 경제(7.2%), 주식 관련 정책(6.4%)을 모두 넘어선 수치다.

18세기 고야의 그림에서 우리는 이성이 잠든 자리를 파고든 맹목과 광기의 괴물을 보았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견제 장치마저 걷어낸 개정 형사소송법은 수단이 목적을 집어삼킨 그 괴물과 다름없다. 앞으로 열릴 지옥문이 두렵다고 호소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10월2일, 이 법이 시행된다.

 

김동기 강원대 초빙교수·전 KBS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