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처럼 쏟아지는 ‘불놀이’… 물줄기 타고 유유자적 ‘뱃놀이’ [밀착취재]

안동 하회마을 ‘선유줄불놀이’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 어둠이 내려앉자 만송정에서 강 건너 부용대 쪽으로 이어진 줄에 하나둘 불이 붙었다. 수백개의 불씨가 천천히 떨어지며 밤을 밝혔다. 화약이 터지는 굉음도, 한순간 밤하늘을 수놓고 사라지는 섬광도 없다. 줄을 따라 작은 불씨가 한 시간가량 이어지는 하회마을의 전통 불놀이, ‘선유줄불놀이’다.

‘선유(船遊)’는 배 선(船)에 놀 유(遊), 말 그대로 배를 타고 노닌다는 뜻이다. 선유줄불놀이는 조선시대 하회마을 선비들의 선유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음력 7월16일이면 부용대 아래 낙동강에서 선유시회(船遊詩會)를 열고 불놀이를 즐겼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에서 강 건너 부용대까지 연결된 다섯 가닥의 줄에 불이 붙자 수백개의 불씨가 천천히 흘러내리며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관람객들은 자리를 지키며 낙동강 위로 펼쳐지는 하회마을의 전통 불놀이 ‘선유줄불놀이’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하회마을 전통문화 보존 활동을 해온 김종흥 장인은 “유생들이 병산서원에 모였다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경치를 보고 시를 지었다

선유줄불놀이를 앞두고 낙동강에 띄운 배 위에서 김종흥 장인(왼쪽 두 번째)과 출연진들이 선비들의 뱃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선유(船遊)’는 배를 타고 노닌다는 뜻으로, 옛 선비들은 배를 띄워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 김종흥씨 제공

”며 “하회에 도착하면 그 가운데 장원을 뽑아 축하하며 함께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강을 가로지른 줄에는 숯봉지를 달았고, 부용대에서는 불붙인 솔가지 다발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낙화’를 했다. 강물에는 불을 밝힌 ‘달걀불’을 띄웠다. 줄불과 낙화, 달걀불, 뱃놀이가 어우러져 하나의 놀이를 이룬다.

오늘날의 불꽃놀이와 가장 다른 점은 화약 대신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뽕나무 뿌리와 소나무 껍질 등을 태운 숯을 곱게 빻아 소금과 섞고, 마른 쑥으로 만든 심지와 함께 창호지에 넣어 숯봉지를 만든다. 이를 줄에 매달아 불을 붙이면 쑥 심지를 따라 숯가루가 타면서 불티가 아래로 떨어진다.

관람객이 선유줄불놀이에 쓰일 숯봉지를 직접 만들고 있다. 곱게 빻은 숯가루와 마른 쑥으로 만든 심지를 종이 위에 놓고 정성스럽게 봉지를 만든다. 종이에는 저마다의 소원도 적었다.
숯가루와 쑥 심지를 넣은 종이를 길게 말아 묶으며 숯봉지를 완성하고 있다. 손으로 하나하나 만든 숯봉지는 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린다.

김 장인은 “한번 불을 붙이면 한 시간 정도 탄다”며 “쑥 심지가 타고 들어가면서 숯가루가 타고, 그것이 불꽃이 돼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숯봉지를 만드는 일은 지금도 주민들의 손을 거친다.

이날 관람객들도 줄불에 쓰일 숯봉지를 직접 만들었다. 종이에 저마다의 소원을 적고 숯가루와 쑥 심지를 넣어 완성한 숯봉지는 본공연 때 다른 숯봉지와 함께 줄에 매달려 불을 밝혔다.

본공연에 앞서 하회별신굿탈놀이도 펼쳐졌다.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회원들은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익살스러운 말과 몸짓으로 양반과 선비 등 당시 지배층의 허위와 모순을 풍자했다. 서민들의 삶과 해학을 담은 탈놀이와 선비들의 선유 문화를 보여주는 줄불놀이가 한자리에서 하회의 오랜 전통을 보여줬다.

선유줄불놀이 본공연을 앞두고 장승장인 김종흥씨가 낙동강변에서 장승을 깎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자 경북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 앞 낙동강변이 선유줄불놀이를 기다리는 관람객들로 빼곡히 들어찼다. 가족과 연인, 친구들과 함께 온 사람들은 돗자리 위에 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최근에는 선유줄불놀이를 보기 위해 하회마을을 찾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이날도 공연 몇 시간 전부터 관람객들이 만송정 앞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가족 단위 관람객부터 젊은 층, 외국인 관광객까지 몰리면서 강변은 일찌감치 사람들로 채워졌다. 한때 수만명의 관람객이 한꺼번에 몰려 주변 도로가 마비되기도 해 현재는 회차별 3000명 규모의 사전예약제로 관람 인원을 관리하고 있다. 김 장인은 “폭죽처럼 펑펑 터지는 것과 달리 조용히 불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젊은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양반과 선비가 몸에 좋다는 ‘소불알’을 서로 차지하겠다며 한데 엉켜 실랑이를 벌인다. 선유줄불놀이가 열린 이날 하회마을 상설공연장에서는 하회별신굿탈놀이도 펼쳐졌다.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말 속에 양반과 선비의 욕심과 허위를 꼬집는 하회탈놀이 특유의 해학이 녹아 있다.

올해는 한·일 정상외교의 무대에도 등장했다. 5월19일 안동에서 정상회담을 한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만찬을 마친 뒤 하회마을에서 선유줄불놀이를 함께 관람했다. 두 정상은 줄불과 부용대의 낙화, 이를 소재로 한 창작 판소리 공연을 감상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봄밤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불꽃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는 소감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달 29일 공연이 시작될 무렵에는 비가 내렸다. 몇 시간 전부터 기다리던 사람들 위로 우산이 하나둘 펼쳐졌지만 대부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어둠 속 강을 가로지른 줄에서는 불티가 떨어지고 부용대에서는 낙화가 쏟아졌다. 배 위에서는 시조창이 이어졌다.

수백년 전 낙동강에서 이어졌던 선유의 불빛은 세월을 건너 오늘의 하회마을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비가 내린 이날 밤에도 사람들은 우산을 든 채 천천히 사그라지는 불빛을 끝까지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