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10일, 봄비가 내리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 세계 72개국의 여성대표와 회원 15만여 명이 모였다. 여성들은 가정과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전쟁과 폭력이 없는 세계를 만드는 데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이날 세계평화여성연합(WFWP)이 창설됐으며 한학자 총재가 초대 총재로 추대됐다.
한 총재는 창설대회에서 여성들이 세계평화운동의 중심에 서는 ‘여성시대’의 도래를 선포했다. 이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거나 남성이 행사해 온 권력을 여성이 대신 차지한다는 선언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쟁과 지배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를 돌봄과 협력, 화해와 생명존중의 문화로 전환하기 위해 여성들이 평화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한 총재가 강조한 여성의 평화적 역할은 생물학적인 모성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갈등하는 구성원을 대화의 자리로 이끌며, 가장 약한 사람의 생명과 미래를 지키는 책임의식에 가까웠다. 모성적 사랑을 여성에게만 귀속시키지도 않았다. 남성과 여성 모두가 실천해야 할 평화의 가치로 보면서도, 오랫동안 가족과 공동체를 돌봐온 여성들의 경험에 관계를 회복하고 갈등을 치유하는 지혜가 축적돼 있다고 보았다.
세계평화여성연합은 ‘인류 한 가족 평화세계’라는 비전 아래 여성지도자 교육과 국제교류, 구호와 봉사, 종교·인종·문화 간 화해사업을 전개했다. 한국에서 출발한 활동은 세계 각국으로 확대됐으며, 1997년에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가 국제 NGO에 부여하는 최고 등급인 ‘포괄적 협의지위’를 획득했다. 이 지위는 경제·사회·교육·보건·인권 등 여러 분야에서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활동하며 상당한 국제적 조직 기반을 갖춘 NGO에 주어진다. 여성연합은 이를 바탕으로 유엔 관련 회의에 참석해 의견서와 보고서를 제출하고 구두 발언과 의제 제안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지역 여성들의 경험과 목소리를 국제사회의 평화 의제와 연결하고,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NGO의 협력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도 넓어진 것이다.
여성연합은 가난과 질병, 교육기회의 부족으로 고통받는 여성과 어린이를 지원하고 학교와 의료시설, 직업교육과 생활자립 사업을 펼쳤다. 단지 구호물품을 전달하는 일회성 자선에 그치지 않고, 현지 여성들이 자신의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지도자로 성장하도록 힘을 쏟았다. 국가와 종교, 문화가 다른 여성들이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세계적인 평화 네트워크도 구축해갔다.
전쟁과 분쟁의 가장 큰 피해를 감당해 온 여성들이 이제 평화 논의의 주변부를 벗어나 갈등을 치유하고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주체로 나선 것이다. 1992년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 모인 15만 여성의 다짐은 국경과 종교를 넘어 세계 여성의 연대로 확산되며, 사랑의 힘으로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는 실천운동으로 뿌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