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처음으로 긴 여행을 갔을 때 스케치북 첫 장에 외가댁을 그렸다. 아파트에서 줄곧 살아온 내게 박공지붕이 씌워진 집은 외가댁이 유일했다. 나중에 그런 형식을 ‘불란서 주택’이라 부른다는 걸 알았다. 프랑스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1970년대에 문화적으로 프랑스를 동경하면서 생긴 명칭이다.
외가댁은 20년 전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헐렸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그 집이 기억 속에서 소환된 곳이 있었다. 바로 숙명여대 근처에 있는 ‘카페 킷테’에서였다. 이 집은 외가댁보다 40년은 더 오래됐다. 외형도 비슷하지 않다. 그럼에도 외가댁에서 느꼈던 안온하고 낯익은 감정이 그곳에서 떠올랐다.
카페 킷테의 존재감은 붉은색 땅 위에 피어오른 한 송이 노란 꽃처럼 강렬하다. 하지만 시기적으로는 그 주변에 있는 적벽돌의 다세대주택보다 훨씬 먼저 지어졌다. 연한 겨자색 외관에 뾰족한 세 개의 박공지붕이 중첩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이 일대에 들어섰던 일본인들의 문화주택 중에서도 이질적이다. 그럼, 왜 이런 형태로 집을 지었을까?
야마자키 가쓰사부로는 1917년에 도쿄상공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도쿄상공학교는 현재 고등학교와 비슷했으니 이를 근거로 이 집을 지을 당시의 나이를 추정해 보면 대략 30대 초반이 된다. 종합해 보면, 이 집은 젊고 열정적인 CEO가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욕망을 일깨우는 주택 상품이었다. 그래서 문화주택 중에서도 기존의 관습을 따르기보다는 실험성을 택했다.
그럼, 이 파격적인 주택은 성공했을까? 야마자키 가쓰사부로가 이 집을 짓고 2년이 지난 1932년에 자신이 설립한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에 입사한 사실로 봐서는 성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젊은 CEO는 조선이라는 낯선 땅으로 넘어온 일본인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식민국은 식민지의 지명에 본국의 지명을 가져다 붙이고 새로 짓는 도시와 건축물에 본국에서 유행하는 양식이나 형태를 적용한다. 식민지로 이주한 이들에게 낯선 타국이 아닌 확장된 본국에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주민들에게 낯선 땅에서 살아야 하는 집은 새로움이나 이국적임보다는 본국에서 누렸던 익숙함에 그곳에서 동경했던 호사로움이 가미된 형태여야 했다.
해방 후 이 집은 미군정청에 의해 적산(敵産)으로 인수됐다. 그리고 1960년, 현재 카페 킷테를 운영하는 이준호 대표의 외할아버지가 사들였다. 8명의 딸과 함께 이곳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장면을 상상해 본다. 그들은 정원이 있는 남쪽 현관이 아닌 북쪽 현관을 통해 들어섰을 것이다. ‘현관(玄關)’이라는 명칭에 쓰인 ‘검을 현(玄)’자가 어스름한 공간을 선호했던 일본인들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고 무엇보다 응접실이 북쪽 현관과 연결돼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집의 주출입구는 지금과 달리 북쪽 현관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문 너머의 집을 보며, 어린 자매들은 소리를 지르며 신이 났을 테고 마당을 보는 순간에는 숨바꼭질하며 뛰놀지 않았을까? 그 모습을 보며 부모님은 타지 생활을 정리하고 시작한 서울에서의 안정된 삶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 옆에 있던 할머니는 나무로 지은 집으로 견뎌야 할 겨울을 걱정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11명, 3대 가족의 삶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이후 60년간 집은 가족의 삶을 굽어봤다. 어떤 날에는 연분을 만난 딸이 이곳을 떠나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새로운 식구가 이곳을 찾기도 했다. 아마도 집이 가장 기뻤던 날은 떠나갔던 딸들과 그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이 마당을 놀이터 삼아 뛰놀던 명절이었을 테고, 가장 슬펐던 날은 이곳을 사용했던 할머니와 부부가 세상을 떴을 때였을 것이다. 어쩌면 2015년 마지막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집도 자신의 끝을 직감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여덟 명의 자매는 복원공사를 통해 집의 삶을 더 연장해 주기로 했다. 건축가 정이삭(에이코랩건축사사무소 대표)은 건축주의 자매를 처음 만나던 날, 그들이 이곳에서 겪은 희로애락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리모델링의 방향을 집이 준공된 시점으로 되돌리지 않고 집이 살아온 세월을 드러내는 것으로 잡았다. 정이삭에게 이 집은 20세기 초 서구식, 일식, 한식이 뒤섞인 문화적 혼종성과 가족의 삶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이었다.
카페 킷테를 갔을 때 처음 자리 잡은 곳은 마당에 있는 테이블이었다. 가을의 농도 깊은 빛을 받은 집의 외형을 탐닉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잠시 후 마당에 있었다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함께 국을 끓여 먹었다는 가족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안에는 어떤 흔적이 남아 있을까 궁금해 집안을 둘러보자 사촌들과 만화책을 읽었다던 방과 수납장으로 썼다는 도코노마(床の間)를 볼 수 있었다. 선룸(Sunroom) 안에 서서 마당을 바라보자 이번에는 같은 곳에서 손주들이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았을 이 집의 주인이 떠올랐다. 그리고 순간, 생각은 외가댁 우물가에 다라이(큰대야)를 놓고 물놀이를 하던 어릴 적 나와 이를 웃으며 바라보았던 외할머니 표정에 이르렀다.
카페 킷테는 이제 한 식구를 위한 어제의 집이 아닌, 모두에게 ‘키테 구다사이(?てください·와주세요)’라고 말을 건네는 환대의 공간이 되었다. 시간이 흘렀으니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라진 외할머니집을 찾아갈 수도 없다. 남은 건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뿐이다. 가족의 기억을 품고 있는 카페 킷테는 진짜 고향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느꼈던 편안함과 아늑함을 통해 짧은 귀향을 허락해 준다. 어쩌면 추석이 되어도 갈 고향이 없는 현대인들이 체감할 수 있는 귀향은 그 잠깐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