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출신 과학자 닐 맥컬럼 리슬링에 매료
1979년 북섬 마틴버러에 ‘드라이 리버’ 설립
피노그리·게뷔르츠트라미너 등 알자스 품종 재배
‘올해의 젊은 와인메이커상’ 벤 맥냅 인터뷰
뉴질랜드 북섬 마틴버러(Martinborough)에는 보통 뉴질랜드 와인과 결이 완전히 다른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 하나 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그 흔한 소비뇽 블랑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게뷔르츠트라미너, 피노 그리, 리슬링 등 프랑스 알자스에서 주로 재배하는 품종을 심습니다. ‘마틴버러의 작은 알자스’로 불리는 드라이 리버 와인즈(Dry River Wines)랍니다. 와이너리 이름은 '말라 있는 강'이지만 와인은 촉촉한 향기로 가슴을 적십니다. 한국을 찾은 와인메이커 벤 맥냅(Ben McNab)과 마틴버러 땅에서 피어난 알자스 품종의 매력을 따라갑니다.
◆옥스퍼드 출신 과학자, 리슬링에 반하다
드라이 리버 설립자 닐 맥컬럼(Neil McCallum) 박사는 원래 와인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유기화학 박사 과정을 밟던 1966년, 독일 리슬링 한 잔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본인 표현을 빌리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합니다. 뉴질랜드로 돌아와서는 정부 산하 과학연구소 DSIR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지만, 그 리슬링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과학 연구 예산이 점점 줄어들면서 연구원 생활에 점점 회의를 느끼게 됐고, 와인을 향한 열정은 반대로 커져갔습니다. 이에 닐은 웰링턴 근교 로어 헛(Lower Hutt)에서 열리던 와인 시음 모임에 드나들며 그 열정을 키웁니다. 그러다 이 모임에서 만난 토양학자 친구 데릭 밀른(Derek Milne)과 ‘의기투합’해 포도밭을 일굴 땅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둘은 뉴질랜드 곳곳을 두고 고민했습니다. 남섬의 소비뇽 블랑 제국, 말버러(Marlborough)도 후보에 올랐지만, 닐은 “쿡 해협을 매번 비행기로 건너고 싶지 않다”며 차로 갈 수 있는 마틴버러(Martinborough)를 택했습니다. 결국 1977년 두 사람은 북섬 끝자락 와인 산지 와이라라파(Wairarapa) 마틴버러의 한 테라스 지형을 발견합니다. 물빠짐 좋은 자갈땅이었습니다.
2년 뒤인 1979년, 닐은 연구원 일을 이어가면서 아내 던 맥컬럼(Dawn McCallum)과 함께 그 땅을 사들입니다. 와이너리 이름은 근처 오래된 양 목장에서 따왔습니다. 바로 드라이 리버입니다. 1983년 소량의 소비뇽 블랑과 게뷔르츠트라미너로 첫 와인을 만들었고, 1984년엔 첫 상업 빈티지를 내놓았습니다. 닐은 1988년이 돼서야 DSIR을 완전히 그만두고 와인 일에 올인합니다.
닐과 던 부부가 알자스 품종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둘은 알자스를 여행하다 리슬링에 다시 한번 매료되고 맙니다. 특히 알자스 최고 명가 진트 홈브레히트(Zind-Humbrecht) 와인에 푹 빠졌습니다. 이 도멘은 척박한 땅에서 수확량을 극도로 낮추고, 포도밭 하나하나의 개성을 와인에 그대로 옮겨 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과학자 출신답게 닐은 마틴버러의 서늘한 기후와 자갈 토양이 알자스와 똑 닮았다는 사실을 데이터로 확인합니다. 그래서 진트 홈브레히트의 철학을 이 땅에 그대로 옮겨오기로 결심합니다.
같은 시기, 토양학자 친구 데릭도 자신만의 밭을 마틴버러에 마련합니다. 사실 마틴버러는 그때까지 포도밭이 하나도 없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다섯 와이너리가 한꺼번에 이곳에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드라이 리버, 데릭이 세운 마틴버러 빈야드(Martinborough Vineyard), 아타 랑기(Ata Rangi), 치프니(Chifney), 테 카이랑가(Te Kairanga)입니다. 다섯 와이너리 모두 처음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무명의 땅에 도박을 건 셈입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다섯 와이너리 와인이 잇달아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마틴버러는 순식간에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와인 산지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지금도 와인 업계에서는 이 다섯 와이너리를 마틴버러를 만든 ‘개척자 그룹’으로 부릅니다.
드라이 리버는 1983년부터 1985년 사이, 두 번째 포도밭 크레이그홀(Craighall)을 새로 조성했고 1987년엔 첫 피노 누아가 세상에 나옵니다. 1992년엔 세 번째 밭 로벳(Lovat)이 조성돼 현재 드라이 리버 포도밭 포트폴리오를 완성합니다. 소비뇽 블랑은 2006년을 끝으로 더 이상 생산하지 않고 리슬링, 게뷔르츠트라미너, 피노 그리, 샤르도네, 피노 누아만 만듭니다.
과학자 다운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1991년 말 일어난 대규모 화산 폭발로 기온이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수준까지 떨어지자 포도밭에 반사 필름을 깔아 자외선을 반사시키는 방법으로 이를 극복합니다.
닐은 2003년 와이너리를 미국 투자자 줄리언 로버트슨(Julian Robertson)과 레그 올리버(Reg Oliver)에게 넘겼지만 2011년까지 수석 와인메이커로 활동합니다. 와이너리는 2022년 11월 웰링턴의 사업가 찰리 정(Charlie Zheng)에게 인수되면서 다시 뉴질랜드 자본으로 돌아옵니다. 드라이 리버는 마스터 오브 와인(MW) 밥 캠벨(Bob Campbell)이 이끄는 뉴질랜드의 대표적인 와인 평가 매체 더 리얼 리뷰(The Real Review)의 2024년 평가에서 ‘뉴질랜드 톱 와이너리’로 선정, 닐이 일군 명성을 이어갑니다.
◆세 개의 밭이 만드는 개성
드라이 리버의 밭은 루아마훙가강(Ruamahunga River) 옆, 마틴버러 테라스 위에 있습니다. 자갈이 많고 물이 잘 빠집니다. 여름엔 낮과 밤의 기온차가 커 포도가 천천히 오래 익으니 산도는 살아있고 향은 짙어집니다. 밭은 세 곳입니다. 가장 먼저 심은 드라이 리버 에스테이트(Dry River Estate)는 1979년생입니다. 지금도 피노 누아의 뼈대를 책임집니다. 2024년부터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이름표를 달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크레이그홀은 가장 춥고 바람이 세고 돌이 많습니다. 그만큼 산도가 살아있고 구조가 단단합니다. 리슬링과 샤르도네가 여기서 자랍니다. 로벳은 해발 33m로 낮아 세 밭 중 가장 따뜻합니다. 큰 자갈과 바람이 과실 향을 한층 짙게 만듭니다. 게뷔르츠트라미너의 집입니다.
드라이 리버는 어린 나무를 빼고는 물을 주지 않습니다. 물이 없으면 뿌리는 생존을 위해 스스로 땅속 깊이 물을 찾아 나섭니다. 깊게는 40m에서 70m까지 땅속을 파고듭니다. 그 결과 수확량은 ha당 2t~3.5t에 그칩니다. 부르고뉴 그랑 크뤼가 3t~5t인 것과 비교하면 훨씬 박한 수치입니다. 그만큼 포도알 하나하나에 힘이 응축됩니다. 드라이 리버 와인에서 아로마가 겹겹이 쌓인 복합미와 빼어난 미네랄이 잘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벤 맥냅의 양조철학
벤 맥냅은 뉴질랜드 마틴버러가 속한 와인 산지 와이라라파(Wairarapa)에서 나고 자란 3대째 농부입니다. 대학 시절 웰링턴의 와인숍 무어 윌슨(Moore Wilson)에서 일하며 드라이 리버 와인을 처음 만납니다. 이후 드라이 리버 밭에서 여름 인턴으로 일합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셈입니다.
팰리서 에스테이트(Palliser Estate)를 거친 그는 2021년 뛰어난 솜씨를 인정받아 ‘토넬르리 드 메르퀴레(Tonnellerie de Mercurey) 올해의 젊은 와인메이커 상’을 받았습니다. 이 상은 프랑스 부르고뉴 오크통 제작사인 토넬르리 드 메르퀴레가 뉴질랜드와인생산자협회(NZ Winegrowers)와 손잡고 신진 와인메이커 발굴을 위해 후원하는 대회에서 주는 상입니다.
그리고 2022년 11월, 드라이 리버의 새 와인메이커로 발탁됩니다. 벤은 자신을 창작자가 아니라 ‘수호자’라고 부릅니다. “닐 맥컬럼이 그려낸 원래 비전을 지키고 되살리는 게 제 역할입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단 하나입니다. 포도를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 두는 일입니다. 재료가 모든 걸 지배하거든요.” 마틴버러에 대한 자부심도 뚜렷합니다. “마틴버러는 벌크 와인을 만들지 않아요. 수확량은 적고 품질은 높은, 파인 와인의 땅입니다. 이런 와인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와 숫자만 들여다봐서는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포도나무 한 그루, 가지 하나까지 직접 손으로 만지고 살피면서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맺어야 나오는 결과물이죠.”
드라이 리버의 양조철학은 세 단어로 요약됩니다. 드라이 파밍, 정교한 가지 손질, 선별적 솎아내기입니다. 작은 팀이 나무 한 그루씩 직접 손으로 돌봅니다. 최근엔 땅을 갈아업지 않는 무경운 경작, 커버크롭, 자연 퇴비 등으로 토양을 건강하게 되돌리는 재생 농법(regenerative farming)까지 더해, 다음 세대까지 이어갈 지속가능한 포도밭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병에도 철학이 담겼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특별 제작한 유리병을 씁니다. 병목 지름을 정교하게 설계해 코르크로 들어오는 산소량을 최소로 조절합니다. 오래 두고 마실 수 있게 만든 세심한 설계입니다.
◆드라이 리버 대표 와인
드라이 리버 와인은 에노테카 코리아를 통해 한국에 수입됩니다.
▶드라이 리버 게뷔르츠트라미너(Gewürztraminer)
오렌지 마멀레이드와 잭프루트, 말린 살구 향으로 시작해 잔을 흔들수록 큐민과 페누그릭(fenugreek) 같은 향신료가 올라옵니다. 시간이 지나면 구운 파인애플과 꿀 향까지 겹겹이 쌓입니다. 입에 닿으면 부드럽고 오일리한 질감이 먼저 느껴지고, 약간의 단맛 뒤로 산미가 받쳐줘 지루하지 않게 마무리됩니다.
1992년 로벳 밭에 심은 콜마르(Colmar) 클론으로 만듭니다. 알자스 ‘와인가도’에 있는 콜마르는 ‘쁘띠 베니스’로 유명한 여행지입니다. 당도는 보통 20g 안팎(리터당)으로 잔당이 살짝 남는 오프드라이 스타일입니다. 5년에서 10년, 그 이상도 숙성이 가능합니다.
태국식 그린커리나 향신료가 강한 아시아 요리와 잘 맞습니다. 와인의 단맛이 매운맛을 부드럽게 감싸주기 때문입니다. 기름진 훈제 오리나 삼겹살 구이 같은 육류도 좋은 짝입니다. 와인의 산뜻한 산미가 고기의 느끼함을 깔끔하게 잡아줍니다.
▶드라이 리버 리슬링
라임 제스트와 레몬 껍질 향이 산뜻하게 올라오고, 시트러스 꽃과 인동초 같은 흰 꽃향기가 뒤따릅니다. 잘 익은 배와 백도 향도 은은하게 섞여 있고, 잔을 흔들면 회향과 바질을 으깬 듯한 허브 향까지 느껴집니다. 이어 굴껍질과 젖은 강돌을 연상시키는 짭짤한 미네랄 향이 뚜렷합니다. 입에 닿으면 신선한 레몬즙 같은 산미가 곧게 뻗어나가고, 백팔레트에서는 분필 같은 촘촘한 질감이 입안 전체에 침이 돌게 만듭니다. 앞부분은 부드럽고 유혹적이지만 뒤로 갈수록 단단하고 팽팽한 산도가 중심을 잡아, 긴 여운으로 마무리됩니다.
크레이그홀 밭의 포도로 만들며, 잔당은 아주 적어 5~6g(리터당) 수준으로 거의 드라이에 가깝습니다. 알코올 도수는 11.5% 안팎으로 낮은 편입니다. 7년에서 10년 정도 숙성하면 더 좋습니다.
매콤한 한식 초무침이나 회무침과 잘 어울립니다. 와인의 날카로운 산미가 매콤한 양념과 생선 비린내를 깔끔하게 씻어줍니다. 담백한 흰살 생선회나 굴 같은 신선한 해산물도 좋은 선택입니다. 와인의 짠맛 도는 미네랄이 해산물 본연의 풍미를 한층 끌어올립니다.
▶드라이 리버 피노 그리
드라이 리버 에스테이트 포도를 사용합니다. 젖은 돌과 미네랄 향이 먼저 올라오고, 이어 키위와 잘 익은 배, 망고 같은 핵과일 향이 짙게 퍼집니다. 여러 차례 사용한 오크통에서 효모 앙금과 함께 오래 숙성해 캐슈넛과 브리오슈, 크림, 바닐라 향까지 더해지고, 시간이 지나면 꿀과 크렘 브륄레 같은 달콤하고 고소한 뉘앙스도 올라옵니다. 입에 닿으면 압도적인 볼륨감과 묵직한 질감이 먼저 느껴지고, 은은한 단맛 뒤로 촘촘하게 짜인 탄닌이 받쳐줘 무겁지 않게 균형을 잡습니다. 매끄럽고 실크 같은 질감이 끝까지 이어지며 여운이 깁니다. 2020년 빈티지는 밥 캠벨 MW가 “뉴질랜드 최고의 피노 그리”라 평하며 97점을 줬습니다.
버터를 넉넉히 쓴 크림 파스타나 리소토와 궁합이 좋습니다. 와인의 묵직한 질감이 크리미한 소스와 잘 맞물립니다. 오리 간 파테나 푸아그라처럼 기름진 요리, 혹은 숙성 치즈와도 잘 어울립니다. 알자스 전통 마리아주답게 와인의 유질감이 리치한 풍미를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드라이 리버 샤르도네
자몽과 굴껍질, 생강, 브리오슈 향이 힘 있게 올라오고, 백도와 천도복숭아, 청멜론 같은 신선한 과실 향이 그 뒤를 받칩니다. 구운 헤이즐넛과 비스킷 향도 은은하게 깔리고, 부싯돌을 연상시키는 미네랄 향이 중심을 단단히 잡아줍니다. 입에 닿으면 정교하고 촘촘한 산미가 곧게 뻗어갑니다. 효모 앙금 숙성 덕분에 실크처럼 부드럽고 크리미한 질감이 산미와 균형을 이루고, 끝까지 에너지 넘치는 긴 여운으로 마무리됩니다.
크레이그홀과 드라이 리버 에스테이트 포도를 씁니다. 오크통에서 12개월, 이후 스틸 탱크에서 3개월 더 효모 앙금과 숙성합니다. 부분적으로 젖산 발효(MLF)를 거쳐 산미를 부드럽게 다듬습니다.
버터 소스를 곁들인 랍스터나 구운 관자와 잘 맞습니다. 와인의 크리미한 질감이 버터 소스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집니다. 크림 리소토나 그라탱처럼 진한 크림 베이스 요리도 좋은 선택입니다. 팽팽한 산미가 크림의 무게감을 깔끔하게 정리해줍니다.
▶드라이 리버 피노 누아
체리와 블루베리 파이, 카시스, 블랙베리 향이 짙고, 그 뒤로 제비꽃과 장미 같은 화사한 꽃향기가 겹칩니다. 시간이 지나면 흑연과 다크 초콜릿, 말린 허브, 낙엽 같은 흙내음까지 복합적으로 올라옵니다. 첫 모금은 달콤한 과실미가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지만, 이내 촘촘하고 실키한 탄닌이 중심에서부터 뻗어 나옵니다. 자연스러운 산미가 과실의 무게감과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향신료 풍미와 함께 촘촘하고 정교한 여운이 길게 이어집니다.
드라이 리버 에스테이트, 크레이그홀, 로벳 세 밭의 포도를 블렌딩합니다. 여과와 청징을 거치지 않아 병속에서 계속 진화합니다.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16~18개월 숙성하고 10년 이상 숙성 잠재력이 있습니다.
양념이 강하지 않은 오리 요리나 등심 스테이크와 잘 어울립니다. 촘촘한 타닌이 육즙 많은 고기의 무게감을 든든하게 받쳐줍니다. 숙성 소고기나 버섯 요리도 좋은 짝입니다. 와인의 흙내와 향신료 향이 숙성된 풍미, 버섯의 감칠맛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