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백범일지’는 독립운동가의 영웅담을 넘어, 한 인간이 시대의 폭력과 패배, 망명과 분열을 견디며 어떤 나라를 꿈꾸었는지를 담은 기록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는 문장으로도 잘 알려진 ‘백범일지’는 종종 독립운동가 김구의 위인전처럼 읽힌다. 그러나 책의 첫인상은 찬란한 영웅 서사와 거리가 있다. 이 책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의 형식에서 출발한다. 개인의 삶을 정리하는 고백이자 망국과 식민지의 시대를 건너온 한 인간이 후대에 남긴 절절한 증언이다.
김구/ 돌베개/ 1만9000원
김구는 자신을 완성된 지도자로 그려내지 않는다. 황해도 해주에서의 성장 과정부터 동학농민운동 참여, 치하포 사건과 옥살이, 탈옥과 망명에 이르는 삶의 굴곡을 비교적 솔직하게 기록한다. 분노와 후회, 두려움과 결단이 교차하는 서술은 김구를 먼 기념비 위의 인물이 아니라 시대의 고비마다 선택해야 했던 한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백범’이라는 호 역시 이 책을 읽는 핵심 열쇠다. 백범에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사람으로 남고자 한 뜻이 담겼다. 김구가 꿈꾼 독립은 몇몇 지도자의 권력 획득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존엄을 누리는 공동체의 회복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백범일지’의 주인공은 김구 한 사람에 머물지 않는다. 이름 없이 투쟁하고, 감옥에 갇히고, 타국에서 생계를 이어간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동포의 얼굴이 책 곳곳에 드러난다.
책은 상권과 하권, 해방 이후의 기록인 ‘계속분’ 그리고 ‘나의 소원’으로 구성된다. 상권이 김구의 성장과 초기 투쟁을 따라간다면, 하권은 1919년 상하이 망명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이어진 독립운동의 시간을 담는다. 이봉창·윤봉길 의거와 한인애국단 조직, 중국 각지를 옮겨 다닌 피난의 시간, 임시정부 내부의 갈등과 노선 차이까지 함께 기록한다.
‘백범일지’가 오늘날까지 읽히는 까닭은 광복을 향한 기록이 해방 이후의 과제를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구에게 독립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강한 군사력이나 물질적 풍요만을 앞세우는 나라가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으로 세계에 기여하는 나라를 바랐다.
‘나의 소원’에서 드러나는 문화국가론은 오늘의 독자에게도 질문을 건넨다. 경제 성장과 국가 경쟁력이라는 말이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김구는 문화의 힘과 타국을 침략하지 않는 평화의 가치를 국가의 이상으로 제시한다. ‘백범일지’가 단순한 독립운동 연대기를 넘어 민주주의와 평화, 시민의 존엄을 생각하게 하는 고전으로 남는 이유다.
돌베개의 이번 개정증보판은 2026년 유네스코 ‘백범의 해’를 기념해 출간됐다. 도진순의 현대어 번역과 주해를 바탕으로 ‘정본 백범일지’의 근대 국어 문장을 원전의 맛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다듬었다. 원문 소개 중심의 주석은 줄이고, 상·하권과 ‘계속분’, ‘나의 소원’의 흐름에 맞춰 장절 구분과 제목을 재구성해 독자가 전체 맥락을 보다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