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은 되고, 팔레스타인은 안 되고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1차대전 휴전 이듬해인 1919년 창설된 국제연맹은 오늘날 유엔의 전신(前身)에 해당한다. 국제연맹 본부는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 제네바에 세워졌다. 미국은 국제연맹 출범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음에도 그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데 실패했다. 연방의회 의원들의 뿌리깊은 ‘고립주의’ 탓이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국가들 간 분쟁을 수수방관하는 사이 독일에선 나치 세력이 득세하고 이웃 나라 침략을 일삼았다. 국제사회가 1차대전이란 비극을 겪고도 2차대전 발발을 막지 못한 것은 미국이 빠진 국제연맹의 한계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왼쪽)과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페제시키안은 유엔 총회 기간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를 방문해 총회에서 연설할 예정인 반면 압바스는 미 행정부의 입국 비자 거부로 그렇게 할 수 없게 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1945년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실패한 국제연맹은 유엔으로 개편됐다. 1946년 1월 열린 제1차 유엔 총회는 유엔 본부를 스위스 등 유럽 국가가 아닌 미국에 두기로 의결했다. 미국 없는 유엔은 국제연맹처럼 무용지물에 그칠 것이란 우려가 그만큼 컸다. 유엔과 미국을 서로 단단히 묶어 놓음으로써 국제연맹 시절과 달리 미국이 유엔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개입하게 만들려는 포석이었다. 1952년 미국 제1의 대도시 뉴욕 맨해튼에 준공된 유엔 본부 청사는 미국과 유엔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자리를 잡았다.

 

유엔 본부는 비록 미국 영토에 있으나 ‘유엔 본부 협정’이라는 국제법의 적용을 받는다. 이 협정은 “미국 정부는 외국 관리가 유엔 회의 참석을 위해 뉴욕을 방문하는 것을 막아선 안 된다”는 명문 규정을 두고 있다.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할 수 있는 미국의 주권(主權)에 일종의 제한을 가한 셈이다. 2025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이 9월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기 위해 뉴욕 방문을 추진했다. 팔레스타인은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아니지만 옵서버 국가로 유엔에 대사를 상주시키고 있다. 미 국무부는 압바스 수반의 비자를 취소하는 방식으로 그의 미국 입국을 막았다. 맹방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감안한 조치였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유엔 본부 협정 위반”이라며 항의했으나 미국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 국제법의 일종인 유엔 본부 협정은 ‘미국 정부는 외국 관리가 유엔 회의 참석을 위해 뉴욕을 방문하는 것을 막아선 안 된다’는 취지의 명문 규정을 두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17일 미국과 전쟁 중인 이란의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오는 23일 유엔 총회에 참석해 연설할 것이란 소식이 전해졌다. 미 행정부가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할 수 있도록 입국 비자를 내준 것이다. 미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란과의 평화 협정 체결을 간절히 바라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가 느껴진다. 다만 팔레스타인 압바스 수반의 유엔 본부 방문과 총회 연설은 2025년에 이어 올해도 무산됐다. 트럼프가 보기에 이란은 되고 팔레스타인은 안 되기 때문인 걸까. 힘이 없으면 무시당하는 국제사회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