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와 귀금속의 만남…김경신 40년 예술세계 한자리에

9월23일부터 10월2일까지
서울 안국동 한옥갤러리 소허당

한지(韓紙)와 귀금속을 결합한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해 유럽 무대에서 활동해온 김경신 작가가 23일부터 10월 2일까지 서울 안국동 한옥 갤러리 소허당에서 개인전 ‘빛과 색깔, 그리고 조형’을 연다. ‘빛 속의 한지, 그 매혹(The Enchanting World of Light in Hanji)’을 부제로 한 이번 전시는 한지와 귀금속, 옻칠, 도자, 조명과 공간조형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 이어온 작가의 작업세계를 한자리에서 보여준다.

 

김 작가의 예술적 출발점은 서울 북촌 한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창호지를 투과해 방 안으로 스며들던 아침 햇살의 은은한 빛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작가의 작업을 이끄는 근원적인 이미지로 남았다. 작가는 “한지는 세상의 빛을 품고 있으며, 그 빛을 담아내는 일이 제 예술의 시작이자 여정이었다”고 말한다.

 

김경신 작가의 개인전 ‘빛과 색깔, 그리고 조형’ 주요 작품.

김 작가는 서울산업대(현 서울과학기술대)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포르츠하임 조형대학에서 귀금속공예와 조각을 공부하고 장신구 및 금속공예 디자이너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하이델베르크대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며 독일을 거점으로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특히 한지와 금속을 결합한 ‘한지 귀금속’은 김 작가를 대표하는 작업이다. 가볍고 물에 강하면서도 빛을 투과하는 한지의 특성에 금속의 구조성과 반사성을 더해 브로치, 귀걸이, 목걸이 등 새로운 형태의 장신구를 만들어냈다. 금속을 원자 분해해 한지와 결합하는 공법으로 국제특허를 취득했으며, 귀금속과 유리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유럽 공예계에 새로운 재료와 조형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제적인 활동도 이어졌다. 1994년 프랑스 코미테콜베르 국제디자인공모전 1위, 1998년 독일공예대상, 1999년 제네바 국제발명박람회 은메달을 수상했다. 2007년에는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 헌정 장신구전에 세계 디자이너 64명 가운데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됐으며, 2011년 G20 정상회의 갈라쇼에서도 각국 정상 배우자들에게 작품을 선보였다. 독일 존스박물관과 에틀링엔성박물관 개인초대전, 영국 해롯백화점 한국특별전,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독일공예가 초대전 등 유럽과 미국에서 100회가 넘는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작가에게 한지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다. 빛을 받아들이고 머금으며 다시 내어놓는 살아 있는 매체다. 여러 겹의 한지를 쌓고 표면을 처리한 뒤 금속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한지의 부드러움과 금속의 구조성, 한지의 투과성과 금속의 반사성이 하나의 작품 안에서 어우러진다.

 

빛은 이 같은 작업의 핵심이다. 작가는 빛을 직접 묘사하기보다 빛이 머물 수 있는 구조와 공간을 만든다. 빛은 한지 사이로 스며들고 금속 표면에 반사되면서 시간과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색과 깊이를 드러낸다. 한지는 표면인 동시에 공간이 되고, 기억을 담는 그릇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여는 창이 된다.

 

작업은 한지귀금속에 머물지 않는다. 한지에 옻칠과 채색을 더하고 금속과 조명을 결합하는가 하면, 도자와 다완, 소반, 가구 등 생활공예로 영역을 넓혀왔다. 전통을 과거의 형식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삶 속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작업관이다.

 

이번 전시가 열리는 소허당은 안동교회가 운영하는 북촌 초입의 한옥 갤러리다. 목구조와 창호를 통과하는 자연광 아래에서 한지 조형물을 감상할 수 있어 전시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북촌 한옥에서 시작된 어린 시절의 빛이 독일에서의 조형예술 교육과 유럽의 디자인 환경을 만나 어떤 새로운 조형언어로 확장됐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김경신의 40년 작업은 결국 빛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담아내는 과정이다. 어린 시절 창호지를 통과했던 한 줄기 햇살은 한지와 금속, 옻칠과 조명을 거쳐 새로운 형태의 빛으로 되살아났다. 오래된 전통 재료인 한지가 현대 조형예술의 언어로 어떻게 새롭게 빛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