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미국을 이해하는 엄선된 이야기>
※‘美슐랭’은 미국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야기를 엄선해 전하는 코너입니다. 워싱턴 특파원이 빠르게 소비되는 뉴스를 넘어, 오늘의 미국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맥락과 시각을 전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금융 거래를 사실상 차단하는 고강도 제재를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ICC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한 이후 재판소를 무력화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이 크게 강화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 ICC 대규모 제재 준비 중”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일(현지시간) 자체 입수한 정부 문건과 미 당국자들을 인용, 트럼프 행정부가 ICC에 대한 대규모 제재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제재는 6∼7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친 뒤 ICC와의 대부분의 거래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조치가 시행될 경우 ICC의 미 달러화 거래가 금지돼 국제 금융 시스템의 상당 부분에서 배제될 수 있으며, 재판소 운영에 심각한 타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
최종 결정과 발표 시점은 아직 불분명하다. 다만 일부 미국 당국자들은 이번 주 유엔총회 기간 또는 그 직후 제재안이 확정될 수 있다고 밝혔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구체적인 제재 결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ICC를 미국의 주권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있다는 기존 입장을 강조했다. 미 재무부는 논평을 거부했으며 ICC는 논평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미 ICC를 겨냥한 압박의 일환으로 다수의 재판소 관계자를 제재한 바 있다. 여기에는 성폭력 의혹으로 지난 7월 ICC에서 축출된 카림 칸 전 검사장과 아카네 도모코 ICC 소장, 여러 재판관, 2명의 부검사장, 네타냐후 총리와 다른 이스라엘 당국자들에 대한 사건을 담당하는 수석 검사 등이 포함된다. 칸 전 검사장은 성적 비위 의혹을 부인해왔다.
하지만 WSJ가 보도한 당국자들의 언급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가 현재 준비 중인 제재는 이보다 훨씬 강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개별 ICC 관계자가 아니라 ICC와 이뤄지는 광범위한 거래 자체를 제재 대상으로 삼는 방식이다. 문건에 따르면 통신 서비스와 관련한 거래는 제재 대상에서 제외된다.
유럽 국가들과 일본 등 ICC의 주요 지지국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으로부터 재판소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지는 불분명하다. 유럽연합(EU)이 역내 은행들에 ICC와 계속 거래하도록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루비오 장관은 지난 7월 트럼프 행정부가 ICC를 겨냥한 광범위한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며 필요하다면 재판소를 “벽돌 하나하나씩(brick by brick)” 해체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ICC가 비회원국 당국자를 겨냥한 것은 위험한 선례를 만들었으며 미국의 주권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모두 ICC 회원국이 아니다. 미국이 ICC와 관련 가장 크게 문제 삼아온 것이 ICC가 설립 규정인 로마규정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의 국민에게도 일정한 경우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는 이른바 관할권 문제다.
WSJ는 루비오 장관이 상원의원이던 2022년에는 ICC의 비회원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를 ICC가 수사하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공동 발의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ICC는 2023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다른 러시아 당국자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네타냐후 영장 발부로 극단적 관계 악화
미국과 ICC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것은 네타냐후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이스라엘 국방장관 사건이다. ICC는 2024년 네타냐후 총리와 갈란트 전 장관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들은 가자지구 전쟁 수행 과정에서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았다. ICC는 두 사람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인 하마스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의 유입을 막았다고 판단했으며, 이는 국제인도법 위반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네타냐후 총리와 갈란트 전 장관은 혐의를 부인해왔다.
ICC는 또 네타냐후 정부의 극우 성향 각료 2명인 베잘렐 스모트리히 재무장관과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장관에 대해서도 요르단강 서안의 유대인 정착촌 확대에 관여한 혐의로 수사를 진행해왔다. 유엔은 해당 정착촌이 국제법에 위배된다는 입장이다. 칸 전 검사장은 2023년 10월 7일 공격과 관련해 하마스 지도부에 대해서도 체포영장을 청구했지만 이들은 이후 전투 또는 암살로 사망했다.
미국은 ICC 설립 근거인 로마규정에 서명했지만 이를 비준하지 않아 ICC 회원국이 된 적은 없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2000년 로마규정에 서명했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2002년 미국이 로마규정의 당사국이 될 의사가 없다고 공식 통보했다. 이후 미국은 자국민에 대한 ICC의 관할권에는 반대하면서도 행정부에 따라 전쟁범죄 수사 등에 제한적으로 협력해왔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는 미국이 비회원국 옵서버 자격으로 로마규정 당사국 회의에 참여하는 등 ICC와의 관여를 확대하기도 했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는 ICC와의 갈등이 크게 격화됐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과 중앙정보국(CIA) 관계자들의 전쟁범죄 혐의를 조사한 ICC 관계자들을 제재했고, 조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이 제재를 해제했다. 이후 ICC가 2024년 네타냐후 총리 등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면서 미국과 ICC의 갈등은 다시 급격히 악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