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녀를 ‘아시아의 마녀’라고 불렀다.
마법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손에 쥔 건 투포환 경기에서 던지는 4㎏짜리 쇳덩이, 포환이었다.
겨울의 태릉선수촌. 포환에는 얼어붙은 모래가 달라붙었다. 턱 아래에 포환을 붙이고 힘껏 밀어낼 때마다 거친 모래가 살을 긁어 턱이 찢어지고 피가 났다.
그래도 포환을 내려놓지 않았다.
피를 닦고 다시 던졌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많이 던졌는지 훈련하던 자리만 움푹 파였다.
그렇게 던진 포환은 점점 더 멀리 날아갔다.
1970년 처음 아시안게임 정상에 올랐고 4년 뒤 다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여자 육상에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안긴 선수. 그의 이름은 백옥자다.
올림픽 가고 싶어 택한 ‘개인 종목’
1951년 인천에서 태어난 백옥자는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운동 신경이 좋은 아이였다. 농구와 배구를 하며 올림픽 무대를 꿈꿨다.
단체 종목보다 개인 종목이 태극마크를 다는 데 빠를 것 같았다. 마침 체육교사가 육상 신인발굴대회를 권했다. 그렇게 처음 손에 쥔 것이 포환이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반대했다. 도시락도 싸주지 않았다. 백옥자는 용돈으로 자장면이나 우동을 사 먹으며 부모 몰래 훈련을 이어갔다.
훈련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뛰었다. 운동 안 한 척,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박문여중 2학년이던 1965년 전국체전에서 여중부 신기록을 세웠고 박문여고에 체육 장학생으로 진학한 뒤에는 한국기록을 연달아 갈아치웠다.
1968년에는 고교생 신분으로 멕시코시티올림픽 무대에 섰다.
세계의 벽은 높았지만 2년 뒤 아시아가 그를 기다렸다.
두 번의 금메달과 마녀의 탄생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투원반에서 동메달을 딴 뒤 주종목인 투포환에서는 14m57의 대회 신기록을 세웠다. 한국 여자 육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이었다.
4년 뒤 열린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을 앞두고는 백옥자의 몸이 무너졌다. 신우염을 앓았고 무릎까지 다쳐 진통제를 맞고 뛰어야 했다. 여기에 처음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중국 선수들까지 가세했다. 백옥자의 눈에 이들은 ‘거인’처럼 보일 만큼 체격이 컸다.
하지만 백옥자는 16m28의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 방콕에 이어 아시안게임 2연패였다.
이 대회에서 평생 따라다닐 별명도 얻었다.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의 회고에 따르면 한 싱가포르 기자가 붙여준 말이었다. 싱가포르에서 마녀는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마법을 부리는 멋진 존재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아시아의 마녀’, 그 이후
1978년 백옥자는 현역에서 물러났다. 인천체고 교사로 5년을 지낸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한동안 필드를 떠나 있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대한육상경기연맹은 미국에 있던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서른다섯,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백옥자는 8년 만에 유니폼을 입고 필드로 돌아왔다.
결과는 4위. 전성기 기량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백옥자는 그렇게 마지막 아시안게임을 마쳤다.
현역 시절 세운 기록은 오랫동안 한국 여자 투포환의 기준으로 남았다. 이후 백옥자는 지도자와 행정가로 활동했고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까지 맡으며 오래도록 육상 곁에 남았다.
일본 아이치·나고야에서는 또 한 번의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다. 23일부터 육상 경기도 시작됐다.
첫 금메달을 따낸 지 50여년이 흐른 지금도 백옥자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아시아의 마녀’. 마법은 없었다. 피가 나도 다시 던졌던 4㎏짜리 포환과 그 시간을 견딘 선수가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