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시아 게르스텐되르퍼의 한 달은 자조모임 초대장을 보내는 일로 시작된다. 독일 자살 유족단체 아구스(AGUS) 베를린 지부를 이끄는 그는 한 달에 한 번 유족 자조모임을 연다. 초대장이 나가면 신청서가 돌아온다. 많은 달엔 30통 가까이 된다.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하인의 한 아동심리센터 안 모임방은 30명을 다 받기엔 좁다. 참석자를 조정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자조모임은 평일 오후 6시에 열린다. 퇴근한 직장인도 올 수 있는 시간이다. 주황빛 조명 아래 카펫이 깔린 방에서 유족 20여명이 2시간 동안 저마다 마음속 응어리를 꺼내놓는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그곳에서 만난 파트리시아는 모임을 소개하며 “누군가 감정을 쏟아내는 것과 다른 누군가가 그 감정에 압도되지 않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게 자조모임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2007년 자살로 남편을 잃은 뒤 이 모임에 합류했다.
23일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독일의 연령표준화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9.7명(2023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8개국 가운데 22위를 기록했다. OECD 평균(10.7명)을 조금 밑도는 수준으로 한국(24.8명)의 절반이 안 된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1980년 1만8500명에 이르던 자살 사망자는 2000년대 들어 1만명 안팎으로 줄었다. 그러나 그 뒤로 20년째 더 내려가지 않고 있다. 2024년에도 1만372명이 자살로 숨졌다.
◆유족이 만든 자조모임, 독일 전역으로
독일에서 자살은 오랫동안 금기였다. 교회가 수세기 동안 자살을 죄악으로 가르친 영향이 컸다. 지금은 다르다. 낙인과 침묵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자살 문제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늘었고, 도움을 청하는 데 대한 두려움도 줄었다는 게 현지 유족들의 말이다. 변화의 중심에는 아구스가 있다. 독일어로는 자살로 가족을 잃은 이들(Angehorige um Suizid)이라는 뜻을 지닌 이 단체의 시작은 한 유족이었다. 1963년 남편의 자살로 사별한 에미 마익스너뵐커는 26년 뒤인 1989년 바이로이트에서 첫 자조모임을 열었다. 독일 최초의 자살 유족 모임이었다. 1995년 사단법인이 된 아구스의 자조모임은 현재 독일 전역 120여개로 늘었다.
아구스는 두 가지 금기를 깨는 데 앞장선다. 자살과 우울증이다. 자신도 유족인 본부 사무국의 엘피 로저는 “유족들이 스스로 인식 개선에 나서면서 많은 당사자가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용기를 얻는다”고 전했다. 이들의 활동은 애도 세미나, 유가족 포럼·강좌, 전국 순회 전시 등으로 나뉜다. 모두 유족의 필요와 제안에서 출발했다. 파트리시아는 “아구스에서 유족은 지원받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필요한 변화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된다”고 했다.
전국 자조모임 운영은 전적으로 유족들의 의지에 따라 진행된다. 그 역시 2010년 기존 운영자가 개인 사정으로 떠나면서 베를린 모임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직접 운영을 맡았다. 이후 애도 세미나, 추모 행사까지 기획하면서 유족들의 상처를 보듬었다.
20대 여성 마리는 아구스의 일반 모임에 나가는 게 버거웠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 또래의 남성들과 마주 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래 유족끼리 편하게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청년 모임을 직접 꾸렸다. 파트리시아가 들려준 이야기다. 베를린의 유족들은 이렇게 모임을 세분화하고 있다. 청년 모임 외에도 자녀를 잃은 부모 모임, 배우자 사별 모임이 따로 있다. 상실의 형태에 따라 겪는 어려움이 다르다는 데 착안해 저마다 필요한 모임을 만든 것이다.
활발한 유족 활동에 비해 제도는 더디다. 독일 정부는 2024년 ‘국가자살예방전략’을 발표하면서 자살 유족을 공식적인 지원 대상에 포함했다. 하지만 실제 서비스를 누가, 어떻게 제공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유족 단체들은 자살예방법에 유족 지원을 명시하고, 이를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구스는 법정 건강보험사의 지원기금을 받지만 지원 규모는 해마다 다르다. 지난해는 전국 건강보험기금 협회로부터 약 8만6500유로(약 1억3400만원) 공동지원기금을 받았다.
파트리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그는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모임을 이끌거나 새 모임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토바이 타고 거리로 나간 유족
지난달 22일 낮 베를린의 개선문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오토바이 200여대가 늘어섰다. 낮고 묵직한 배기음이 광장을 채웠다. 우울증과 자살을 둘러싼 침묵을 깨자는 오토바이 행진 ‘펠로우즈 라이드’(Fellows Ride·함께 달리기)의 집회였다. 동부지역 책임자 게오르크 폰 뤼덴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심리치료가 필요합니다”로 시작한 그의 발언이 끝나자 참가자들이 하나둘 자신의 우울증과 자살 시도 경험을 꺼내놓았다.
펠로우즈 라이드를 만든 디터 슈나이더는 자살 유족이다. 스물 셋 아들이 자살로 세상을 떠난 뒤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 자살예방 오토바이 라이딩 클럽을 만들었다. 라이딩은 아들과 함께 즐겼던 취미로, 수백대의 오토바이가 모여 자살 예방 캠페인을 벌이면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2021년 뷔르츠부르크에서 처음 시작됐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도 아구스와 다르지 않다. 자살 시도 경험이나 우울증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많은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고백할수록 사회가 자살이나 우울증을 외면하거나 금기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지난달 31일 베를린에서 만난 게오르크는 “정신질환에 대처하는 첫 단계가 질환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며 “나 또한 우울증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디터의 뜻에 공감한 독일 전역의 오토바이 동호인과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캠페인은 국경을 넘었다. 2022년 오스트리아를 건너 포르투갈·루마니아 등 유럽을 거쳐 미국까지 확산됐다. 현재 전 세계 25개 이상의 도시에서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다.
유족들의 연대는 두텁다. 2009년 우울증을 앓다 세상을 떠난 독일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 로베르트 엔케의 아내 테레사 엔케는 남편 이름을 딴 재단을 세웠다. 재단은 우울증이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한편 펠로우즈 라이드의 공식 후원자로 힘을 보태고 있다.
펠로우즈 라이드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정신건강 교육에도 힘을 쏟는다. 직접 개발한 프로그램인 ‘정신건강 응급처치 교육’을 기업에 퍼뜨리고,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 관한 만화책을 제작해 학교에 배포하고 있다. 게오르크는 “한국에서도 캠페인을 열 뜻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다. 한국의 자살 유족들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