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이전에는 한국어가 없었느냐?”
중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저자에게 한 중국인 학생이 던진 질문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기보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바라보는 인식이 깔린 질문이었다. 이 물음은 저자에게 세종과 훈민정음을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다. 세종은 왜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 문자에는 과연 어떤 뜻을 담았을까.
신현덕 전 경인방송 사장이 쓴 ‘세종, 나라 1000년을 그린다’는 세종대왕을 ‘한글을 만든 성군’이라는 익숙한 틀에서 끌어내 국가를 설계한 통치자로 재조명한다.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세종의 ‘독립’에 대한 해석이다. 세종 시대 조선은 중국 명나라의 강한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외교와 군사뿐 아니라 천문·역법과 문자까지 중국의 영향이 미쳤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세종이 조선이 스스로 판단하고 운영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했다고 본다.
대표적인 사례가 ‘칠정산 내편’이다. 조선의 위치에서 일식과 월식, 절기 등을 계산할 수 있는 역법을 마련했다는 것은 단순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넘어 국가가 시간의 기준을 스스로 갖는다는 의미였다. 시간과 절기를 정하는 권한은 곧 국가의 권위와도 연결된다.
북방 영토를 개척하고 국경을 정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는다. 저자는 세종이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대한 개척을 추진하면서 조선의 영토와 국가적 기반을 확장했다고 설명한다. 세종이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과업까지 후대가 이어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핵심은 역시 훈민정음이다. 저자는 훈민정음을 단순히 백성이 쉽게 읽고 쓰도록 만든 문자로만 보지 않는다. 문자 생활에서 소외됐던 백성에게 제 생각을 표현하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문자혁명’으로 평가한다.
세종의 애민정신은 훈민정음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 자체가 문자 창제의 목적을 말해준다. 저자는 여기에 더해 훈민정음 창제에는 조선 백성을 국가의 주체로 바라본 세종의 통치철학이 담겼다고 해석한다.
세종은 문자만 만든 임금도 아니다. 인재를 발탁하고 사가독서제를 통해 학문 연구를 장려했으며, 법치와 행정체계를 정비했다. 태종이 왕권을 안정시키고 세종이 이를 바탕으로 국가의 내실을 다진 과정도 책의 중요한 축이다. 세종이 이룬 수많은 성취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치밀한 국가 경영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세종의 위대함을 단순한 업적의 숫자로 설명하지 않는다. 중국과 일본의 압박 속에서도 조선의 정체성을 지키고, 백성을 국가 운영의 중심에 놓으려 했던 그의 고민에서 세종의 진정한 가치를 찾는다.
저자가 바라본 세종의 꿈은 강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백성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나라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국가였다. 한글로 백성에게 ‘말할 권리’를 주고, 역법으로 ‘시간을 정할 권리’를 갖게 했으며, 영토를 개척해 국가의 경계를 확립한 세종을 저자는 ‘국가의 미래를 설계한 경영자’라는 새로운 시선으로 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