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최근 ‘원전 공론화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을 앞두고 ‘원전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해 3개월간 국민 의견을 수렴한다는 것이다.
과거 원전 관련 공론화는 총 세 차례 있었다. 박근혜정부 시절인 2013∼2015년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 문재인정부 때인 2017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2019∼2021년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가 그것이다. 당시 번번이 공론화 기구의 권고 범위와 중립성 논란에 부딪혔다.
이번에도 정부가 계획을 발표한 지 하루 만에 시민사회가 “핵발전 확대에 짜맞춘 공론화”라며 반발했다. 반대로 이미 정부 여론조사 등에서 원전 필요성에 대한 국민 찬성 의견이 확인된 바 있는데 공론화가 전기본 수립만 늦춘다는 비판도 있다.
정부의 원전 공론화 추진은 언뜻 이런 ‘2중 비판’에 갇힌 듯 보인다. 다만 학계에서는 그간 정부의 여러 공론화 시도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내놓은 바 있다. 갈등 사안에 대한 사회의 수용성을 높이는 데 분명히 효과가 있단 것이다.
과거 원전 공론화에 대한 평가와 공론화 자체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서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원전 공론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주의해야 할 것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신고리 땐 ‘월권’ 논란…이번엔 권고 범위 모호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 22일 국무회의에서 원전 공론화 추진계획을 보고했다. 우선 꾸려질 공론화위원회는 위원장 포함 11명 이내로 구성될 예정이다. 시민참여단 숙의토론과 공개토론회, 온라인 의견수렴을 거쳐 오는 12월쯤에는 권고안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김성환 기후부 장관은 국무회의 종료 후 열린 브리핑에서 “어느 한 쪽의 목소리만 듣거나 단순히 찬반을 묻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공론화위가 ‘무엇’에 대해 논의하고 권고할 것인지 질문이 여러 차례 나왔지만 김 장관은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기후부는 보도자료에서 “미래 전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여러 대안 가운데 하나로서의 원전 역할을 종합적으로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을 뿐이다. 그나마 구체적인 건, 공론화위가 ‘특정 원전 건설 여부’나 ‘신규 건설 규모’를 결정하진 않을 것이란 김 장관의 답이었다.
기후부는 나름 공론화위의 논의나 권고 대상을 넓게 잡아놓은 모양새지만 원전 반대 성향 시민단체는 오히려 협소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신규 핵발전소 저지와 핵없는 사회를 위한 전국행동’(전국행동)은 지난 23일 기자회견에서 전력수요 전망과 그 근거가 되는 반도체·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 규모·입지 계획 적정성이 논의 대상에서 빠졌다고 지적했다. 전국행동은 “결정할 대상도, 선택할 대안도 열려 있지 않은 절차는 진정한 공론화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추후 공론화위가 어떤 권고를 내놨을 때 그 적정성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문재인정부가 2017년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중단 여부를 놓고 진행한 공론화에서 위원회가 내놓은 일부 권고가 ‘권한 밖’이라는 비판이 잇따른 바 있다.
2017년 10월20일 발표된 최종 권고안에서 시민참여단 59.5%가 건설 재개를, 40.5%가 중단을 택했다. 여기에 더해, 원전 정책 방향에 대한 축소 53.2%, 유지 35.5%, 확대 9.7% 조사결과를 근거로 ‘원전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을 추진하라’는 권고까지 이뤄진 것이다. 이를 두고 공론화위 공식 목적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에 대한 권고안 마련이었는데, 중장기 에너지 정책 방향까지 권고한 걸 두고 ‘월권’ 논란이 일었다.
◆반쪽 공론화, 위원장 사퇴…중립성 논란 반복
중립성 논란도 매 공론화마다 잇따랐다.
박근혜정부 임기 중인 2013∼2015년 운영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 권고는 제1차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으로까지 이어졌지만 문재인정부에서 백지화됐다. 시민·환경단체 의견을 배제한 ‘반쪽 공론화’였다는 게 주 논거였다.
문재인정부가 이 절차적 한계를 보완한다며 2019년 5월 출범시킨 공론화 기구인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 같은 경우도 당시 위원장을 맡은 정정화 강원대 공공행정학과 교수가 출범 1년1개월 만에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전격 사퇴하면서 좌초 위기에 직면한 바 있다.
당시 정 교수는 소관 부처인 산업부가 탈핵 시민단체 등을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원전 진흥 및 전력 공급 주관 부처인 산업부가 공론화를 주관하는 구조적 모순 때문에 중립성이 훼손됐다”고 했다. 산업부 측은 이에 “정부가 개입하거나 압박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고, 결국 재검토위는 위원장 직무대행 체제로 공론화가 강행됐다.
이 사례는 우리나라 공론화가 ‘시민 주도’가 아니라 ‘정부 주도’의 한계를 보인다는 학계의 평가와 연결된다. 김정희 부산대 경제통상연구원 연구교수는 2022년 학술지 ‘시민사회와 NGO’(제20권 제2호)에 실은 논문 ‘숙의 민주주의 실험에서 시민의 역할과 권한 확대를 위한 과제’에서 “국외에서는 숙의형 시민포럼의 주관기구가 비영리단체, 전문가집단, 지역의 풀뿌리단체 등으로 다양한 데 비해 국내에서는 행정이 주도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며 “한국사회의 공론화는 ‘시민들의 숙의 민주주의’라는 명목 아래 행정이 주도하고 소수 시민들이 참여하는 또 다른 형태의 ‘동원형 참여’에 불과하다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이번 원전 공론화도 원전 정책 주관 부처인 기후부가 공론화를 주관한다. 담당 부서는 기후부 원전산업정책과다. 공론화위 위원장과 위원 모두 김성환 장관이 위촉한다. 기후부는 보도자료에서 “원전 이해관계자가 아닌 중립적인 인사 중에서 기후부 장관이 위촉”한다고 밝혔다.
전국행동은 이미 정부의 중립성부터 신뢰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내놓은 상태다. 이헌석 전국행동 공동대표는 23일 기자회견에서 “정부는 이미 신규 핵발전소 후보 지역과 석탄발전소 폐지 부지의 SMR 건설 가능성까지 공개적으로 언급해 왔다”며 “정부 자체가 핵발전 추진의 이해당사자처럼 개입한 상황에서 중립적인 공론화를 말할 수 없다”고 했다.
◆1월엔 여론조사, 이제는 공론화…왜 또 묻나
정부는 이미 올해 초 신규 원전에 대한 여론을 물은 바 있다. 전임 윤석열정부 임기 중 정해진 11차 전기본 내 신규 원전 2기 등 건설 계획 추진 여부를 최종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기후부는 지난 1월 한국갤럽과 리얼미터에 의뢰해 대국민 여론조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 원전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갤럽 89.5%, 리얼미터 82.0%로 나왔다. 신규 원전 계획을 추진해야 한다는 응답은 각각 69.6%, 61.9%였다.
이런 여론조사 결과가 있는데도 또 한 번 3개월에 걸쳐 공론화를 진행하는 게 정책 결정만 늦춘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실제 공론화 추진으로 12차 전기본 정부안 확정은 기존 10월에서 연말로 미뤄졌다.
다만 1월 여론조사 결과를 12차 전기본 내 신규 원전 추가 반영 여부에 대한 결론으로 곧장 연결하는 게 무리라는 지적도 가능하다. 그 사이 3대 메가프로젝트가 발표되는 등 전력수요 급증 요인도 출현했다. 당시 여론조사 내 ‘원전 필요성’과 ‘신규 원전 계획 추진’ 문항에 대한 긍정 응답률이 20%포인트 정도 차이나는 부분도 유의해야 할 점이다. 또 두 조사에서 향후 확대가 필요한 발전원을 묻는 질문에 가장 높은 응답률을 기록한 건 재생에너지(갤럽 48.9%·리얼미터 43.1%)였다.
김 장관은 22일 브리핑에서 이와 관련해 “11차 (전기본) 때는 사실 공론화를 했다기보다는 약식 여론조사를 했다고 보는 게 옳다”며 “11차 전기본은 전임 정부 결정을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면 이번 결정은 이재명정부의 온전한 의사 결정”이라고 했다.
◆숙의 거치면 여론 달라져
여론조사와 공론화는 방식부터 다르다. 여론조사가 시민들의 의견을 단순 조사하는 데 그치는 반면 공론화는 충분한 정보 제공과 심도 깊은 토론을 거쳐 개인의 의견과 선호를 변화시킬 수 있단 게 가장 큰 차이다.
실제 사례가 여럿 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서 조사 초반 35.8%에 달했던 판단 유보층 중 55%가 최종적으로 ‘건설 재개’를 택했다. ‘건설 재개’·‘건설 중단’ 측 모두 결론을 존중하겠다고 밝히면서 숙의민주주의 실험이 성공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김정희 교수가 논문 ‘숙의 민주주의 실험에서 시민의 역할과 권한 확대를 위한 과제’에서 분석한 2019년 경남 창원 스타필드 공론화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창원시공론화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시민참여단 판단유보 비율은 1차 토론회 당일 조사 25.3%에서 종합 토론회 당일 3.7%로 줄었다. 참여단 91.8%는 공론화 과정이 공정했다고 평가했고, 반대자 중 90.8%는 최종결과 수용에 긍정적으로 답했다. 이런 판단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소로는 시민 간 ‘조별 토의’가 꼽혔다.
김은주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20년 한국공법학회 학술지 ‘공법연구’(제48집 제4호)에 실은 논문 ‘숙의 민주주의와 공론화위원회’에서 해외 선행연구를 인용해 “숙의를 통한 결정과정에서 모든 당사자들의 주장이 고려된 경우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적은 것을 얻게 되는 사람들에게도 그 결과에 대한 수용성은 당사자간 협상에 근거한 결과일 때보다 더 높게 나타난다”고 소개했다.
◆설계·반영이 관건…“해 봐야 아는” 공론화
김 장관은 이번에 추진하는 원전 공론화의 ‘성과’를 장담하진 않았다. 그는 22일 브리핑에서 공론화로 원전 찬반을 둘러싼 쟁점과 우려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한다”면서도 “실제로 해 봐야 아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학계는 공론화의 효용을 살리기 위한 조건으로 숙의 설계를 꼽는다. 김정희 교수는 논문 ‘숙의 민주주의 실험에서 시민의 역할과 권한 확대를 위한 과제’에서 “시민들이 성찰적이고 사려 깊은 판단에 도달하는 핵심 선결요건은 보다 정교하고 균형 잡힌 공론장 설계와 충분한 논의 시간의 확보”라고 했다.
참여단 밖 시민과의 소통도 관건이다. 김 교수가 논문에서 분석한 두 사례(2019년 창원 스타필드 공론화·2020년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 공론화) 모두 참여단에 소속되지 않은 시민들에게 현장 생중계는 물론 실시간 대화 참여나 의견 교류가 가능한 온라인 채널들이 가동되지 않았다. 김 교수는 이와 관련해 결론 이후에도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 마련되지 않아 포럼의 연속성 및 지속성 차원에서 한계를 노정한다”고 지적했다.
이번에 시작하는 원전 공론화 계획에는 공개토론회와 온라인 의견수렴 병행이 포함됐다. 다만 구체적 운영 방식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권고를 어떻게 12차 전기본에 반영할지도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김정희 교수는 같은 논문에서 “숙의형 포럼에서 시민들은 의제에 대한 결론을 도출할 권리를 갖지만 이는 기존의 정치적 구조 안에서 주어진 제한적 권한일 뿐”이라며 “행정당국의 수용에 따라 시민들의 영향력이 확보됐으나 거부할 경우에도 방법이 없다. 공공정책을 다루는 숙의포럼에서 최종결정권은 집행부에게 귀속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김은주 교수는 논문 ‘숙의 민주주의와 공론화위원회’에서 “공론화위원회 권고는 법적 측면에서 볼 때 자문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행정결정이 이에 구속될 의무는 없다. 그러나 숙의적 의사결정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현대사회에서 시민참여에 의한 행정을 구현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일반시민의 참여를 통해 이뤄진 의사결정을 정당한 이유 없이 수용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측면에서 결정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공론화위 권고안은 이르면 12월쯤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기후부는 이를 포함해 연말 12차 전기본 정부안을 정할 계획이다.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 사이 긴장과 갈등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