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찾은 남미 수리남. 요한 아돌프 펜겔 국제공항에서 수도 파라마리보까지 가는 데만 택시로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도로 양옆으로는 이렇다 할 건물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벌판이 이어졌다. 반면 파라마리보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중국계 상점과 중국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었다.
인구 60만명 남짓의 이 작은 나라가 2년 뒤 본격적인 산유국 대열에 들어선다. 2028년부터 앞바다에서 하루 최대 22만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가동된다. 공항과 도로 등 기반시설 확충이 필요한 수리남에서는 석유 개발을 계기로 대규모 인프라 시장도 함께 열릴 전망이다.
이미 한발 앞서 있는 쪽은 중국이다. 170년 넘는 교류의 역사를 가진 중국은 도로와 통신 등 주요 인프라에 진출했고, 최근에는 해상 석유개발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여기에 미국이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2028년 원유 생산을 앞두고 미국 에너지기업들이 잇따라 진출하면서다.
◆가이아나에 먼저 온 ‘석유 시대’
지난해 수리남에 이어 찾은 이웃 가이아나에서는 수리남의 ‘몇 년 뒤’를 엿볼 수 있었다. 수도 조지타운 인근 유진 F. 코레이아 국제공항은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승객들로 북적였다. 작은 공항의 분주한 모습에서 빠르게 늘어난 항공 수요를 실감할 수 있었다.
2015년 대규모 유전 발견 이후 엑손모빌을 중심으로 해상 석유개발이 본격화하면서 가이아나의 항공 수요도 급증했다. 최근 1년간 이 공항의 국내선 이용객은 약 26만8000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가이아나 정부는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터미널 확충도 추진하고 있다.
이제 ‘석유 잭팟’의 열기가 국경 너머 수리남으로 옮겨붙고 있다. 프랑스 토탈에너지스와 미국 APA 코퍼레이션 등이 참여하는 ‘그란모르구(GranMorgu) 프로젝트’가 핵심이다. 약 120억달러(약 16조5000억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로, 2028년 중반 첫 원유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인구 60만명 남짓인 수리남 경제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규모다. 그란모르구 해상 광구는 엑손모빌이 대규모 유전을 개발 중인 가이아나 해역과 맞닿아 있다.
수리남도 석유 생산을 앞두고 인프라 확충에 나섰다. 정부는 새 터미널과 활주로·관제탑을 비롯해 국제공항과 수도 파라마리보를 잇는 도로를 개선하는 대규모 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향후 공항과 도로 등 인프라 사업을 둘러싼 미·중 기업의 수주 경쟁도 치열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수리남 파고드는 美…정부도 지원사격
트럼프 행정부는 남미 북동부 대서양 연안에서 영향력을 빠르게 넓히고 있다. 올해 1월 니콜라스 마두로 당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압송한 데 이어, 가이아나에서는 엑손모빌이 원유 생산을 주도하고 있다. 수리남에도 일찌감치 손을 뻗었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해 3월 취임 후 첫 카리브해 순방에서 가이아나에 이어 수리남을 찾았다.
수리남을 찾은 루비오 장관은 중국을 공개 저격했다. 찬 산토키 당시 대통령과 회담한 뒤 중국 주도의 인프라 사업을 거론하며 “다른 선택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을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다. 중국 통신 인프라에는 안보 우려까지 제기하며 견제 수위를 높였다.
중국은 즉각 반발했다. 주수리남 중국대사관은 이튿날 루비오 장관의 발언을 “근거 없는 비난”이라고 규정하며 미국이 중국과 수리남의 관계에 균열을 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수리남을 둘러싼 미·중 신경전이 수면 위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미국 기업들의 진출도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APA 코퍼레이션뿐 아니라 셰브론도 지난해 수리남 해상 9·10번 광구에 진출했다. 9번 광구에서는 말레이시아 국영 페트로나스 등과 지분을 나눠 갖고, 10번 광구에서는 지분 30%를 확보해 운영사를 맡았다.
트럼프 행정부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미 상무부와 국무부는 지난 3월 자국 기업을 대상으로 수리남 석유·가스 시장 설명회를 열었다. 이어 6월에는 주수리남 미국대사관과 상무부가 현지에서 ‘미국 석유·가스 산업의 날’을 열어 양국 기업과 정부 관계자 간 사업 협의를 주선했다.
◆170년 뿌리내린 中…이젠 원유까지
하지만 수리남에서 먼저 뿌리를 내린 쪽은 중국이다. 중국과 수리남의 관계는 17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인 1853년 중국인 노동자들이 처음 수리남에 들어왔고, 이후 중국계 주민들은 상업과 유통업을 중심으로 현지 사회에 자리 잡았다. 수리남은 독립 이듬해인 1976년 중국과 수교했다. 올해로 수교 50주년이다.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커진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다. 특히 친중 성향의 데시 바우테르서 행정부(2010∼2020년 재임) 들어 네덜란드 등 서방과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중국의 차관과 인프라 투자가 빠르게 늘었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따르면 바우테르서 집권기에 중국 차관을 기반으로 추진된 사업은 최소 7억7600만달러(약 1조5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화웨이도 통신망 구축에 참여했다.
경제협력 확대와 함께 양국 관계도 밀착했다. 수리남은 2018년 중국의 일대일로에 참여했고, 이듬해 양국 관계를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바우테르서가 물러난 뒤에도 중국과의 협력은 계속됐다. 미국·유럽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던 찬 산토키 전 대통령(2020∼2025 재임)도 2024년 중국을 국빈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중국은 특히 수리남의 풍부한 천연자원에 눈독을 들였다. 중국 광산업체 쯔진마이닝은 2022년 약 3억6000만달러(약 4900억원)를 들여 수리남 로즈벨 금광 지분 95%를 인수하기로 하고 이듬해 거래를 마쳤다. 중국알루미늄공사도 서부 수리남에서 알루미늄 원료인 보크사이트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해상유전에도 뛰어들었다. 중국 국영 페트로차이나는 수리남 해상 14·15번 광구에 진출해 올해 시추 지점을 선정하고 내년부터 탐사 시추에 나설 계획이다.
◆美·中 선점 경쟁 속 정권교체…수리남의 선택은
미국 APA 코퍼레이션과 셰브론에 이어 중국 국영 페트로차이나까지 수리남 앞바다에 진출하면서 미·중의 석유 선점 경쟁도 본격화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수리남에서는 지난해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현지에서 만난 관계자들의 관심도 새 정부의 향방에 쏠려 있었다. 한 달 앞선 5월 총선에서 제니퍼 헤를링스-시몬스가 이끄는 국민민주당(NDP)이 전체 51석 가운데 18석을 차지해 의회 제1당에 오르자, NDP 핵심 인사들과 접촉면을 넓히려는 움직임도 분주했다. 이후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한 시몬스는 수리남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시몬스 정부는 임기 중인 2028년 대규모 원유 생산을 맞는다. 미국에는 베네수엘라와 가이아나에 이어 수리남까지 남미 북동부 에너지 시장에서 입지를 넓힐 기회다. 중국도 170여년간 쌓아온 인적·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새롭게 열리는 석유 시장에서 영향력을 이어가고 있다. 수리남을 둘러싼 미·중의 주도권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인구 60만명의 남미 소국 수리남은 이제 본격적인 원유 생산을 앞두고 있다. 석유와 인프라 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맞붙는 새로운 전략경쟁의 격전지로 부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