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치매로 흩어지는 기억을 붙드는 남자, ‘매카시즘’이란 광풍이 불어닥친 1940년대 할리우드 영화인들, 그리고 공유오피스에서 한 남자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결이 전혀 다른 연극 세 편이 가을 무대에 잇따라 오른다. 한 편은 대사 없이 몸과 음악으로, 한 편은 호텔 객실에서 이어지는 심문으로, 마지막 한 편은 연습실 즉흥극으로 기억과 신념, 그리고 타인의 비극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묻는다.
◆말 대신 몸으로 그린 기억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연극 브랜드 ‘연극열전’의 20주년 기념 시즌 ‘연극열전10’을 마무리하는 작품이다. 연출가 기욤 피지가 2011년 영국 런던에서 창단한 극단 시어터 리의 대표작이 여러 국제 공연예술축제에서 호평받은 뒤 2019년 우란문화재단 초청공연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2022년 한국 배우들이 출연한 라이선스 초연과 2023년 재연을 거쳐 3년 만에 다시 열린 무대는 55세 생일을 맞은 ‘톰’의 아침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주머니에 빨간 넥타이가 든 남색 재킷을 입으라던 딸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빨간색’이라는 단어에만 붙잡힌다. 그러다 어디선가 들려온 ‘재킷’이라는 소리에 이끌려 교복 재킷을 걸친다. 그 순간부터 무대는 톰의 가장 아름답고 아팠던 시절로 향한다. 사랑과 우정, 만남과 헤어짐, 삶과 죽음의 장면이 순서 없이 뒤섞여 되살아난다.
이 극에는 대사도 노래도 없다. 배우 네 명의 움직임이 장면과 장소를 만들고 연주자 두 명이 피아노·바이올린·퍼커션·루프스테이션을 오가며 실시간으로 선율을 쌓는다. 치매를 다룬 이야기는 상실의 비극으로 기울기 쉽지만 이 작품은 잃어버리는 것보다 끝내 남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매 시즌 한국을 찾아 연습을 직접 이끌어 온 피지가 올해도 연출을 맡았다. 톰 역은 지난 시즌에 이어 출연하는 전성우와 새로 합류한 박정원·백성현이 번갈아 맡는다. 백성현은 신체 연기에 새롭게 도전한다.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11월 29일까지.
◆‘웃음의 대학’ 미타니 고키의 신작
일본 극작가 겸 연출가 미타니 고키의 신작 ‘아메리칸 드림’은 일본 초연 무대 그대로 한국 관객을 만난다. 지난 8월 도쿄 파르코극장에서 개막해 교토·삿포로·오카야마·오사카·아이치·후쿠오카를 거친 투어의 마지막 무대다. 일본어로 공연하고 한국어 자막을 제공한다.
한국 관객에게 미타니는 전시 검열관과 희극 작가의 대결을 그린 ‘웃음의 대학’으로 친숙하다. 희극으로 이름난 그는 이번 작품을 “진지한 작품이다. 물론 웃음은 있지만 이번에는 희극이 아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무대는 냉전이 본격화한 1940년대 후반 할리우드다. 당시 미국 하원 비미활동위원회는 영화계의 공산주의 활동 여부를 조사했다. 1947년 청문회에서 증언을 거부한 각본가·감독 등 ‘할리우드 텐’은 의회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복역했고 이후 수백 명의 영화인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작품은 이 역사를 호텔 객실 하나에 압축했다. 여배우와 영화감독, 유럽에서 망명한 극작가 ‘마이스터’, 인기 각본가가 차례로 불려 들어와 두 조사위원과 마주 앉는다.
질문은 하나다. “당신은 현재, 혹은 과거에 공산주의자였습니까?” 동료 이름을 대느냐, 일자리를 잃더라도 거부하느냐를 놓고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한다. 네 차례 심문이 쌓이는 동안 생존과 양심, 우정과 배신이 엇갈린다. 잡담처럼 흘러가던 대화 사이로 위협이 파고드는 미타니 특유의 빠른 대사가 110분 동안 밀실을 심리전의 장으로 바꿔 놓는다.
미타니는 “적색 사냥을 소재로 하지만 그 시절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더 보편적이고 오늘날 일본에서도 통하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2016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를 겪은 한국 관객에게도 남의 나라 옛일로만 읽히지 않는다. 서울 코엑스아티움 우리은행홀에서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고선웅 신작 ‘투신’
지난해 14년 만에 내놓은 창작극 ‘유령’에서 무연고자들의 쓸쓸한 죽음을 다뤘던 고선웅 연출가가 이번에는 신작 ‘투신(Two Scenes)’을 선보인다. 마방진 창단 20주년 기념작으로 고선웅이 구성·연출을 맡았고 대본은 공동창작했다.
봄날 반지하 연습실에 오랜만에 모인 배우들과 연출가가 영상 하나를 함께 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공유오피스에서 한 중년 남성이 숨진 사건을 담은 CCTV 화면이다. 화면에는 그 순간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한 주변 사람들이 있다. 배우들은 사건 조서 속 인물들을 즉흥극으로 되살려 본다. 그러나 인물들의 사연이 드러날수록 배역과 배우 자신의 일상이 뒤엉키고 연습실은 걷잡을 수 없는 긴장으로 치닫는다.
제목에는 ‘몸을 던진다’는 뜻에 ‘두 장면’이 겹쳐있다. 사건이 벌어진 현장과 그것을 되짚는 연습실, 두 장면이 서로를 비추며 죽음 자체보다 그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을 바라본다. 타인의 비극을 방관하는 사회를 객석 앞에 세우는 셈이다.
마방진에서 여러 작품을 연출해 온 서정완이 극 중 연출가 오광수를 연기하고 음악을 맡은 김용화는 자기 이름 그대로 무대에 선다. 배우와 배역,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설정이다. 사회가 외면한 죽음을 연극 만들기 틀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유령’에서 이어진 문제의식을 다시 확장하는 무대다. 서울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11월 13일부터 2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