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구진이 뜨거운 열을 가하지 않고 상온에서 꿈의 신소재라 불리는 ‘그래핀’과 ‘그래파이트(흑연)’ 박막을 기판 위에 직접 자라나게 하는 획기적인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차세대 고성능 전력선 제조의 핵심 원천기술을 확보함에 따라 향후 전기차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 대규모 전력이 필요한 분야의 전력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전기연구원(KERI)은 전력케이블연구센터 김호섭 박사와 남수현 연구원 연구팀이 산업 현장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코팅 장비인 ‘스퍼터링(Sputtering)’을 개조해 별도의 가열 과정 없이 상온에서 한두 겹 수준의 매우 얇은 그래핀부터 여러 겹이 쌓인 그래파이트 박막까지 기판 위에 직접 성장시키는 기술을 구현했다고 27일 밝혔다.
최근 전기차 산업의 급성장과 AI 데이터센터 가동 확대 등으로 각종 전력기기가 사용하는 전력량이 급증하면서 기존 전선의 크기를 유지하면서도 전력 손실과 열 발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새로운 도체 소재 개발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탄소 원자가 육각형 벌집 모양으로 연결돼 전기·열 전도성이 뛰어난 ‘그래핀’을 기존 구리 전선과 결합한 ‘복합도체’가 유력한 대안으로 주목받아 왔다.
하지만 기존 고품질 그래핀 제조 방식인 ‘화학기상증착(CVD)’ 기술은 1000도에 가까운 가열 장치가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생성된 그래핀을 다른 기판으로 옮겨 붙여야 하는 까다롭고 복잡한 ‘전사(Transfer) 공정’을 거쳐야 했다.
이 때문에 아주 얇은 스티커를 찢어지지 않게 옮겨 붙이는 것만큼 공정이 까다로워 면적을 넓히거나 구리 등 금속과 그래핀을 겹겹이 다층으로 쌓아 올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연구팀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제조 현장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스퍼터링’ 방식에 주목했다.
스퍼터링은 진공 상태에서 가스 입자를 충돌시켜 튕겨 나온 원자를 기판에 쌓는 방식으로 생산성이 높다.
다만 탄소 재료를 스퍼터링하면 원자 배열이 흐트러지며 무질서한 막으로 굳어버려 규칙적인 결정 구조를 가진 고품질 그래핀을 만드는 것은 그동안 학계와 산업계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으로 여겨졌다.
김호섭 박사팀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스퍼터링 공정 중 눈에 보이지 않게 이동하는 탄소 입자들의 미세한 거동을 분석해 냈다.
연구진은 탄소 입자가 구겨지거나 뭉치지 않고 배열될 수 있는 조건을 세밀하게 제어할 수 있는 ‘직류(DC) 기반 K-sputtering’ 장치와 전용 공정을 독자적으로 설계 및 제작했다.
이 기술의 핵심은 탄소를 표면에 무작위로 흩뿌리는 대신 바닥 기판의 미세한 결을 따라 탄소 원자들이 스스로 나란히 줄을 서며 쌓이도록 만드는 ‘에피택시(Epitaxy) 성장’을 구현한 점이다.
마치 밑그림이 그려진 바탕에 레고 블록을 정교하게 맞추듯 원자를 규칙적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원리다.
이를 통해 가열 장치 없는 상온 상태에서도 한두 겹의 그래핀부터 다층 그래파이트까지 정돈된 형태의 탄소 박막을 세계 최초로 직접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신뢰성을 입증하기 위해 인천대학교 김준호 교수팀, 경북대학교 이세희 교수팀과 협력해 라만분광법, 원자힘현미경(AFM), 투과전자현미경(TEM), 결정 방향 분석(EBSD) 등 첨단 분석 기법으로 구조적·물성적 완성도를 엄격하게 교차 검증했다.
이번 성과는 복잡한 전사 공정 없이 단일 스퍼터링 장비 안에서 구리와 같은 금속과 그래핀을 원하는 층수만큼 번갈아 반복 증착할 수 있어 ‘초고성능 복합도체’의 대량생산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산업적 가치가 매우 크다.
연구책임자인 김호섭 박사는 “기존 스퍼터링 기법으로도 규칙적인 탄소 원자 배열을 가진 그래핀계 박막을 상온에서 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세계 최초로 입증했다”며 “향후 장비를 대형화하고 연속 생산 공정으로 발전시켜 전력기기용 고성능 복합도체의 상용화를 이끌고 국내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강조했다.
KERI의 내부 기본사업 지원으로 수행된 이번 연구 결과는 재료 표면 및 코팅 분야 국제 최상위급 학술지인 ‘서피스 앤 코팅스 테크놀로지(Surface & Coatings Technology, IF 6.9)’에 최근 게재됐다.
KERI는 기술 보호를 위해 국내 특허 3건과 국외 특허 1건의 출원을 마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