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의 엄마 유품을 다시 살펴보며 버릴 것을 분류하고 있었다. (…) 백지 사이에서 작은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단어가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입양. 엄마의 글씨가 분명했다.”
다큐멘터리 감독 마민지(37)가 최근 펴낸 에세이 ‘가족관계 특이사항 있음’(클)의 한 대목이다. 어머니 노해숙(1951∼2022)씨의 유품을 정리하다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다. ‘늦둥이 외동딸’로 살아온 마 감독의 입양 당시 이름은 ‘도윤희’였다.
23일 경기 고양 쌍마픽처스 사무실에서 만난 마 감독은 “원래는 코로나19 시기 간병기와 엄마의 유품 정리 과정을 책으로 쓰려 했다”며 “집필 도중 입양 사실을 알게 됐고,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며 책의 내용이 크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코로나19 감염 후 극심한 저산소증으로 입원해 에크모(ECMO) 치료를 받았지만 5개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였음에도 병원비 본인부담금은 수천만 원에 달했고, 부담은 고스란히 마 감독 몫이 됐다.
책은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록이자 자신의 출생을 추적한 여정의 기록이다. 단서를 따라간 끝에 그는 생부모가 경북 성주의 농부였으며 위로 네 남매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홀트 대구지부에 인계된 신생아가 서울로 보내져 입양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부모 찾기는 마 감독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현재 생가족의 막내 언니와 사진을 교환했을 뿐 직접 만나거나 연락을 이어가고 있지는 않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을 입양한 부모의 선택이다. “엄마가 어떤 고민 끝에 나를 입양했는지, 내가 왜 이 가족에 왔는지 알고 싶어요. 내가 오기 전에 부모님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이해하는 것이 저에게는 뿌리를 찾는 일이에요.”
이를 위해 그는 국가아동권리보장원에 어머니의 상담 기록 공개를 청구했지만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입양부모 정보를 볼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음 달에는 직접 보관 기록을 열람하기 위해 보장원 서고를 방문할 예정이다. 마 감독은 “내가 부모님의 유일한 상속인인데 망자의 개인정보를 이유로 자료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납득하기 어렵다”며 “기록을 볼 수 없다면 문제 제기를 지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마 감독은 다큐멘터리 ‘버블 패밀리’(2018)로 이름을 알린 감독이다. 한때 ‘집장사’(소규모 건설 사업)를 하던 부모 아래서 유복하게 자랐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집에 경매 딱지가 붙고 생활이 급격히 무너진 가족사를 담은 작품으로 EIDF 대상을 받았다.
그는 현재 자신의 출생과 입양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가제)를 준비하고 있다. 공개 목표는 2027∼2028년. 그는 “책을 먼저 쓰고 나니 이 이야기를 이미지로는 어떻게 풀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무거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자주 웃었다. 세상을 대하는 예술가로서 태도로는 ‘골계미’를 꼽는다. 사적 다큐멘터리를 계속 만드는 이유를 묻자 “‘다큐 수저’라 어쩔 수 없다”고 웃었다.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서울인 줄 알았는데, 대구인 줄 알았는데, 성주더라고요”라고 답한다.
입양 사실 알게 된 뒤 한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두통과 구토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책을 쓰는 과정에서 마음이 정리되고 덜 괴로워졌다”며 “충격에 뇌 일부분이 망가졌나 싶을 정도로 지나온 일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작업으로 풀어내면서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 모든 작업의 출발점은 어머니가 남긴 기록이었다. 책에는 노 씨의 육필 메모가 다수 실려 있다. 마 감독이 설립한 영화제작사 쌍마픽처스 사무실 한쪽에는 어머니의 유품인 자개장이 놓여 있다. 서울 잠실 올림픽아파트에 살던 시절 어머니가 장만한 세 짝 가운데 남은 것이다. 안에는 어머니가 만든 딸의 성장 앨범이 빼곡히 들어있다.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사랑이 아주 많았던 사람이요. 약간의 집착도 함께.”
책에는 어머니 장례 이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자신을 퀴어로 정체화해 동성 파트너를 만나게 된 이야기도 담겼다. 그는 “사회 통념에 따라 줄곧 남성을 만나왔고, 남성과 결혼하는 삶을 막연히 꿈꿨다”며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후 삶 전체를 원점에서 점검하는 시간을 거쳤다”고 설명했다.
연인과는 4년째 함께하고 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못난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되는데, 오히려 그 점이 좋다”며 “못난 점까지 보여주면서도 계속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족 아닐까 싶다”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