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4일까지 일본에서 열리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 북한은 축구와 역도, 탁구, 레슬링 등 14개 종목에 선수 107명을 출전시켰다. 김일국 체육상도 직접 일본을 찾았다. 북한 장관급 당국자의 일본 방문은 8년 만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한동안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던 북한이 다시 각종 국제대회에 선수단을 보내며 활동 반경을 넓히는 모습이다.
북한의 국제 스포츠 무대 복귀가 본격화하면서 남한을 비롯한 다른 나라와 자연스럽게 접촉하고, 이를 계기로 외교적 대화까지 재개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하지만 북한은 스포츠 교류를 정치적 접촉으로 이어가는 것에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김 체육상이 일본의 접촉 의사를 무시한 것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태도다. 국제 스포츠 무대 복귀가 정치적 대화로 이어지곤 했던 과거 사례와는 다르다. 그러나 스포츠가 완전히 끊기다시피 한 북한과의 대화, 교류를 재개하는 돌파구가 될 것이란 기대는 여전하다.
◆“철저하게 경기를 할 뿐”
넉 달여 전 남한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 출전 때도 그랬다. 지난 5월17일 인천국제공항에 평양을 연고로 하는 내고향여자축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 여자 클럽팀의 첫 방남, 2018년 12월 국제탁구연맹(ITTF) 월드투어 그랜드파이널스 이후 약 8년 만인 북한 선수단의 남한행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꽉 막힌 남북교류를 재개하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기대도 나왔다. 민간 차원의 환영 이벤트도 준비했다. 하지만 북한의 반응은 싸늘했다. 수원FC 위민과의 준결승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리유일 내고향여자축구단 감독은 남북 공동응원 등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우리는 철저하게 경기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며 “경기와 앞으로 이어질 경기에만 집중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공항, 경기장에서 이어진 응원은 철저하게 무시했다. 이 같은 태도는 최근 남한에 대한 북한의 인식에 맞닿아 있다. 북한은 남북한을 더 이상 같은 민족 사이의 특수관계로 보지 않는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며 최대치의 적개심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정상회담을 예비한 스포츠 교류
그렇다고 스포츠 교류가 남북관계의 긍정적 변화를 이끄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아예 접을 이유는 없다. 한반도의 긴장이 높은 상황에서 국제대회를 계기로 양측 선수와 관계자들이 만나고, 그것을 위해 당국 간 접촉을 이어간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남북한은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단일팀을 꾸렸다. 같은 해 포르투갈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도 단일팀으로 출전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한반도기를 앞세워 개회식에 공동 입장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는 북한이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했고, 이듬해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에도 선수단과 응원단이 남한을 찾았다.
이런 이벤트를 성사시키는 과정 자체가 남북한 당국 간 대화이자 교류였다. 선수단의 이동과 체류, 숙박, 경호, 통신 등을 조율하기 위해 실무접촉이 이뤄졌고,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를 앞두고는 평양∼대구 직항편 운항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금강산에서 당국자들이 만나기도 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은 스포츠 교류가 남북한 대화를 선도하고, 우호적 밀착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사례다. 북한은 선수단과 응원단, 예술단을 파견했고 김여정 당시 노동당 제1부부장과 김영남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이 포함된 고위급 대표단이 평창을 찾았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북 고위급 접촉이 재개됐고, 올림픽 이후 특사단의 방북을 거쳐 그해 4월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이처럼 스포츠 교류는 남북 관계자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선수 명단과 이동 경로, 숙박, 통신, 안전 문제 등 대회를 치르기 위해 함께 조율해야 할 사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합의가 없더라도 ‘대회 참가’라는 공통의 목적 아래 실무적인 접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국제대회, 남북 대화 접점 될까
북한이 국제적인 스포츠·문화 교류 자체를 확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일단은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으로 급속도로 밀착한 러시아와의 교류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지난해 6월 올가 류비모바 러시아 문화장관이 125명 규모의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찾아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났다. 같은 해 8월 광복 80주년과 10월 노동당 창건 80주년을 계기로 러시아 예술단이 잇따라 평양에서 공연했고 김 위원장도 직접 관람했다. 양국은 2025∼2027년 문화협력 계획에 따라 예술단체와 문화기관 간 교류도 확대하고 있다.
북한이 이처럼 국제 스포츠·문화 무대에 다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 정세를 긍정적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남북관계가 장기간 단절된 상황에서는 ‘비정치적 만남’이 남북 간 접촉의 기반을 넓히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대화, 협상과 분리돼 진행되더라도 장기적으로 대화와 교류의 물꼬를 트는 하나의 환경을 조성할 가능성은 열려 있기 때문이다.
마침 남북한이 대면할 계기가 될 수 있는 국제 스포츠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다.
2027년 8월 충청 유니버시아드가 열린다. 조직위원회는 북한을 포함한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 회원국에 공식 초청장을 발송했다. 북한은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에는 북한 선수단과 대규모 응원단이 참가한 전례가 있다. 북한이 충청 대회에 참가한다면 24년 만에 남한에서 열리는 유니버시아드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다시 만나게 된다.
내년 브라질에서 열리는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월드컵도 남북한이 마주할 수 있는 무대다. 남북 여자축구 대표팀이 나란히 본선 진출권을 확보하면서 대회 기간 선수단이 자연스럽게 접촉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2028년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개최권도 확보한 상태다. 대회가 예정대로 평양에서 열리고 남한 선수단이 참가할 경우 선수들과 스포츠계 관계자들이 국제대회를 매개로 평양에서 만나는 것이 가능해진다.
전문가들은 스포츠·문화 교류를 대외관계 변화, 특히 남한과의 관계개선을 이끄는 계기가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북한의 태도를 볼 때 국제대회 참가가 남북 대화, 교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 스포츠 교류를 남북관계 개선의 수단으로 지나치게 해석하거나 정치적 이벤트로 만들려 들 경우 오히려 접촉 공간 자체가 좁아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국제대회 참가가 늘어난다는 것은 남한을 포함한 국제사회와 만날 수 있는 접점이 그만큼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포츠 교류가 단기간에 정치적 성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북한이 국제무대로 다시 나오고 있는 흐름을 활용해 가능한 한 접촉의 공간을 넓혀가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다. 북한의 태도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만남과 교류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축적하는 것이 향후 남북 대화의 가능성을 높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태형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남북 당국 간 소통이 막힌 상황에서는 민간 교류를 통해 활로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며 “국제대회와 체육·문화예술단체 등을 활용해 교류부터 늘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 과정에서 쌓인 경험과 신뢰가 향후 더 큰 대화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