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가 긴장했다”… 남위 45도 뉴질랜드 산골짜기의 기적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센트럴 오타고 와인 매력탐구 시리즈 ① 떼루아와 세부산지>

세계 최남단 와인산지로 피노 누아로 명성

전문가들 부르고뉴에 필적할 산지로 평가

대륙성 기후로 건조하고 일교차 매우 커

신대륙의 과실+ 구대륙의 뼈대 결합 

 

센트를 오타고 겨울 풍경. 센트럴오타고와인그로워협회

남위 약 45도. 같은 위도를 따라 지구를 한 바퀴 돌면 칠레와 아르헨티나 최남단 파타고니아를 지나 바다만 이어집니다. 이 극남의 뉴질랜드 산골짜기가 지금 ‘부르고뉴에 필적하는 피노 누아 산지’로 전 세계 와인 애호가를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바로 남섬의 센트럴 오타고(Central Otago)입니다.

 

뉴질랜드 와인산지. 뉴질랜드와인협회

 

◆세계 최남단 피노 누아 낙원

 

센트럴 오타고는 세계 최남단 와인 산지로 꼽힙니다. 남위 45도, 해발 200~450m의 고지대에 포도밭이 펼쳐집니다. 이런 곳에서 포도가 익을 수 있는 건 산맥 덕분입니다. 산지 서쪽에 병풍처럼 선 서던 알프스(Southern Alps)가 태즈먼해에서 몰려오는 비구름과 바닷바람을 막아 줍니다. 바다의 영향에서 벗어나다 보니 온화한 해양성 기후가 대부분인 뉴질랜드에서 유일하게 대륙성 기후를 띱니다.

 

센트럴 오타고 기후. 센트럴오타고와인그로워협회

이 기후의 핵심은 극적인 일교차입니다. 맑은 하늘과 높은 고도 덕분에 강한 햇살과 긴 일조 시간이 이어져 여름 낮 기온은 섭씨 30도까지 오르지만, 밤이면 산에서 찬 공기가 내려와 섭씨 6도 안팎까지 떨어집니다. 덕분에 낮의 햇살은 포도를 충분히 익혀 짙은 색과 풍부한 과실 풍미를 쌓고, 밤의 냉기는 생생한 산도를 단단히 붙잡아 줍니다. 대신 봄가을에는 치명적인 서리 위험이 있어 생산자들은 스프링클러를 돌리고 서리를 막는 대형 선풍기를 가동하며 밤새 포도밭을 지킵니다.

 

센트롤 오타고 위치와 와인산업 현황. 센트럴오타고와인그로워협회

특히 연간 강수량은 350~450mm에 불과할 정도로 뉴질랜드에서 가장 건조하고, 습도가 낮아 포도 껍질에 구멍을 뚫어 수분을 증발시키는 곰팡이인 보트리티스도, 잎과 송이를 말라 죽게 하는 노균병도 없습니다. 덕분에 유기농 재배도 비교적 수월합니다. 다만 산지는 작습니다. 산맥이 만든 보호막을 조금만 벗어나도 너무 춥거나 비가 많아 포도를 기를 수 없어 전체 재배 면적은 약 2000ha에 그칩니다.

 

센트럴 오타고 퀸즈베리. 센트럴오타고와인그로워협회

토양도 독특합니다. 수백만 년 전 빙하가 부수고 옮긴 편암(Schist)이 기반을 이루고, 그 위로 바람에 실려 온 황토(Loess)와 운모, 강자갈이 섞여 있습니다. 편암은 포르투갈 도우루(Douro), 스페인 프리오랏(Priorat), 프랑스 알자스(Alsace) 등 일부 명산지에서만 볼 수 있는 토양으로 잘 쪼개지고 배수가 뛰어나며 척박합니다. 포도나무는 양분과 물을 찾아 암반 깊숙이 뿌리를 잘 내리고, 자연스럽게 수확량이 줄면서 과실의 농축미와 부서진 바위를 연상시키는 미네랄이 와인에 새겨집니다.

 

센트럴 오타고 와인. 센트럴오타고와인그로워협회 페이스북

◆가장 부르고뉴를 닮은 신대륙 피노누아

 

센트럴 오타고 역사는 짧지만 강렬합니다. 1864년 골드러시 시절 프랑스 이민자 장 데지레 페로(Jean Désiré Féraud)가 클라이드(Clyde) 인근에 처음 포도나무를 심었지만 오랫동안 방치됩니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부터 리폰(Rippon), 깁스턴 밸리(Gibbston Valley) 같은 개척자들이 상업적 포도밭을 일구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인 와인 생산은 불과 30~40년 전에 시작됐지만 세계 무대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명성을 얻었습니다. 전체 포도밭의 약 75~80%가 피노 누아일 만큼 이 품종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센트럴 오타고 타라스. 센트럴오타고와인그로워협회

센트럴 오타고 피노 누아가 부르고뉴와 비교되는 이유는 ‘신대륙의 과실’과 ‘구대륙의 뼈대’가 한 잔에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강한 햇살이 다크 체리와 블랙베리처럼 진하고 순수한 과실 향을 끌어내는 한편, 차가운 밤은 부르고뉴 특유의 팽팽한 산도와 섬세한 타닌 구조를 선사합니다. 센트럴 오타고 피노 누아의 매력은 순수함과 강렬함, 복합미로 요약됩니다. 따뜻하고 햇살 가득한 낮에 포도가 충분히 익고, 서늘한 밤에는 신선한 산미와 섬세한 향, 생동감이 지켜집니다. 거친 산악 지형과 돌 많은 토양은 와인에 자연스러운 구조감과 미네랄을 더합니다. 향기롭고 풍성한 과실을 팽팽한 구조감과 실크 같은 질감, 진정한 강렬함이 받쳐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센트럴 오타고 와인 프로페츠 락. 센트럴오타고와인그로워협회 페이스북

이곳 피노 누아는 풍성하고 힘차며, 타닌과 알코올도 비교적 높은 편입니다. 다크 베리와 블랙 체리처럼 잘 익었으면서도 밝은 과실 향이 피어납니다. 영국의 와인 평론가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은 “센트럴 오타고 피노 누아가 부르고뉴를 흉내 내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지녔다”고 평가합니다. 

 

또 하나의 서명 같은 향은 말린 허브 향입니다. 포도밭 주변 언덕에는 1860년대 금광 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는 야생 타임이 무성하게 자랍니다. 벤디고 피노 누아에서는 짙은 과실과 단단한 타닌 사이로 프로방스 허브 같은 은은한 향이 감돌고, 알렉산드라 피노 누아에서는 말린 타임 풍미가 자주 느껴집니다.

 

센트럴 오타고 세부 산지 위치. 뉴질랜드와인협회

◆6개 세부산지

 

센트럴 오타고는 산맥에 둘러싸인 채 호수와 깊은 강 협곡이 교차하는 독특한 지형을 지녔습니다. 포도밭은 약 2100ha로 뉴질랜드 전체의 5% 남짓에 불과하지만, 그 가운데 약 80%를 차지하는 피노 누아는 6개 산지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같은 피노 누아인데 어느 산지에서는 다크 체리와 감초 향을 품은 묵직한 와인이 되고, 불과 몇km 떨어진 산지에서는 산딸기와 허브 향이 싱그러운 가벼운 와인이 됩니다. 고도와 비탈의 방향, 호수와 강, 바람이 산지마다 저마다 다른 미기후를 빚어내 같은 지역 안에서도 수확 시기가 한 달 가까이 벌어집니다.

 

깁스턴.  뉴질랜드와인협회

▶깁스턴(Gibbston)

 

퀸스타운(Queenstown) 동쪽 카와라우 협곡(Kawarau Gorge)을 따라 자리한 깁스턴은 해발 320~420m로 가장 높고 서늘한 산지입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골짜기, 카와라우강(Kawarau River) 남쪽 기슭의 북향 비탈에 약 250ha의 포도밭이 펼쳐집니다. 퀸스타운과 가까워 ‘퀸스타운 산지’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곳은 현대 센트럴 오타고 와인의 출발점입니다. 1987년 앨런 브래디(Alan Brady)가 세운 깁스턴 밸리 와이너리(Gibbston Valley Winery)가 센트럴 오타고 최초의 상업용 피노 누아를 내놓았습니다.

 

서늘하고 비가 많은 편이라 포도가 이웃 산지보다 늦게 익고, 서늘한 해에는 겨울이 오기 전 완숙에 이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덕분에 피노 누아는 바디가 가볍지만 산미가 싱싱하고 과실 풍미가 강렬합니다. 라즈베리와 딸기, 신선한 허브, 섬세한 스파이스가 어우러진 부드럽고 우아한 스타일입니다. 차드 팜(Chard Farm), 페레그린 와인즈(Peregrine Wines) 등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배넉번.  뉴질랜드와인협회

▶배넉번(Bannockburn)

 

카와라우강 남쪽 기슭, 크롬웰 계곡이 끝나는 자리에 펼쳐진 배넉번은 가장 따뜻하고 건조한 산지입니다. 금광 시대 광부들이 ‘사막의 심장(Heart of the Desert)’이라고 불렀을 만큼 메마른 땅입니다. 북쪽으로는 카와라우강과 던스탄(Dunstan) 호수, 동·남·서쪽으로는 케언뮤어(Cairnmuir)와 캐릭(Carrick) 산맥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포도밭 면적은 약 350ha로 해발 220~370m의 완만한 북향 비탈에 주로 자리합니다. 1991년 처음 포도나무가 심겼고 와이너리 펠턴 로드(Felton Road)가 1995년 빈티지 피노 누아 레이블에 처음 ‘배넉번’을 표기했습니다. 2022년 2월 세부 산지 중 처음이자 유일하게 독자적인 지리적표시(GI)로 등록됐습니다.

 

센트럴 오타고 와인. 센트럴오타고와인그로워협회 페이스북

토양은 뉴질랜드에서 가장 다양한 편에 속합니다. 금광 채굴 잔해, 풍화된 경사암(그레이와케), 편암, 옛 호수 바닥 퇴적층, 석영 자갈, 실트와 모래, 바람에 실려 온 황토(뢰스)가 뒤섞여 있습니다. 피노 누아가 약 80%이고 피노 그리, 샤르도네, 리슬링이 뒤를 잇습니다. 수확이 깁스턴보다 최대 한 달가량 빨라 포도가 충분히 익습니다. 햇살을 듬뿍 받은 포도로 다크 체리와 블랙 플럼, 감초 향을 지니면서 농축미와 구조감이 뛰어나 오래 숙성할 수 있는 피노 누아를 만듭니다. 샤르도네와 리슬링도 꽃과 핵과류 향이 짙고 미네랄 느낌이 살아 있습니다.

 

크롬웰.  뉴질랜드와인협회

▶크롬웰·로번·피사(Cromwell, Lowburn and Pisa)

 

던스탄 호수 서쪽의 크롬웰, 로번, 피사는 하나의 세부 산지로 묶입니다. 크롬웰 시내에서 피사 산맥 기슭을 따라 북쪽으로 25km가량 뻗어 있으며, 포도밭이 가장 빽빽하게 모인 센트럴 오타고의 심장부입니다.

 

카와라우강과 클루서강이 만나는 크롬웰은 양조 관련 업체가 몰린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높은 단구와 빙하 퇴적 지형인 모레인, 완만한 선상지가 어우러진 반건조 지대로, 포도밭 대부분은 눈 덮인 피사 산맥과 나란히 이어지는 낮은 단구와 계곡 바닥에 자리합니다. 깁스턴보다 고도가 낮아 훨씬 따뜻하고 건조해 피노 누아가 일찍 익습니다.

 

피사. 센트럴오타고와인그로워협회

로번은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막힌 아늑한 골짜기로,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포도밭을 어루만집니다. 피사는 동향 비탈이 아침 햇살을 먼저 받고 오후에는 산 그림자가 드리워 일교차가 큽니다. 바디감이 풍성하고 다크 체리 풍미에 산미와 타닌이 단단하게 받쳐주는 피노 누아가 나오며, 부드럽고 실키한 질감이 돋보입니다. 피노 그리, 리슬링, 샤르도네, 소비뇽 블랑 등 화이트 품종도 고루 재배합니다. 번 코티지(Burn Cottage)와 아미스필드(Amisfield)의 포도밭이 이곳에 있습니다.

 

벤디고.  뉴질랜드와인협회

▶벤디고(Bendigo)

 

크롬웰 북동쪽, 크롬웰 계곡과 린디스(Lindis) 계곡이 만나는 던스탄 호수 동쪽의 벤디고는 배넉번과 함께 가장 따뜻한 산지로 꼽힙니다. 해발 220m 안팎의 중간 지대와 330~350m의 높은 단구에 포도밭이 있으며, 대부분 햇살을 듬뿍 받는 완만한 북향·북서향 비탈에 자리합니다. 돌이 많은 토양에 군데군데 점토가 섞여 있고, 편암에서 비롯된 빙하 퇴적토에는 규소와 운모, 석영이 풍부합니다. 낮은 곳은 토양이 깊고 물빠짐이 좋으며 높은 곳으로 갈수록 토양층이 얕아져 포도나무가 적당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돌 많은 비탈이 낮의 열기를 품고 밤에는 차고 맑은 공기가 내려앉아, 짙은 과실 향과 단단한 타닌을 지닌 힘찬 피노 누아를 냅니다. 포도밭 주변에 야생 타임이 무성해 말린 허브 향이 은은하게 배어나기도 합니다. 시라를 재배할 수 있을 만큼 따뜻해 피노 누아 외에 피노 그리, 리슬링, 시라도 키웁니다. 프로페츠 락(Prophet’s Rock), 미샤스 빈야드(Misha’s Vineyard), 쿼츠 리프(Quartz Reef)가 대표 생산자입니다. 이웃한 타라스(Tarras)에서는 오래된 빙하 유출 퇴적토 위에서 포도가 자랍니다.

 

와나카.  뉴질랜드와인협회

▶와나카(Wanaka)

 

퀸스타운에서 북쪽으로 80km, 산맥 두어 개를 넘어야 닿는 와나카는 가장 북쪽이자 가장 작은 산지입니다. 와나카 호수 기슭에서 동쪽 루게이트(Luggate)까지 해발 290~320m에 포도밭이 펼쳐집니다. 깁스턴과 기후가 비슷하지만 조금 더 따뜻하고, 크롬웰 일대보다는 서늘하고 비도 조금 더 내립니다. 와나카 호수와 하웨아(Hawea) 호수, 서던 알프스 주능선이 기온을 다독이고 바람을 막아주며 서리 위험을 줄여줍니다. 넓은 호수 수면이 햇빛을 반사해 포도밭에 온기를 더해주는 것도 이점입니다. 덕분에 섬세하고 청량하며 생동감 넘치는 와인이 나옵니다. 1975년 롤프·로이스 밀스(Rolfe and Lois Mills) 부부가 시험 재배를 시작한 리폰(Rippon)이 이곳의 대표 와이너리로, 피노 누아뿐 아니라 리슬링과 가메, 리슬링과 실바너의 교배종 오스테이너(Osteiner)로도 이름이 높습니다.

 

알렉산드라.  뉴질랜드와인협회

▶알렉산드라(Alexandra)

 

가장 남쪽의 알렉산드라는 클루서강과 마누헤리키아(Manuherikia)강이 감싸 안은 분지로, 알렉산드라와 클라이드(Clyde), 언스클루(Earnscleugh) 일대에 포도밭이 흩어져 있습니다. 1864년 프랑스 출신 금광꾼 장 데지레 페로(Jean Désiré Féraud)가 클라이드 인근에 몬테 크리스토(Monte Christo) 포도원을 일군, 센트럴 오타고에서 가장 먼저 포도를 심은 곳입니다. 뉴질랜드 최고 여름 기온이 자주 기록될 만큼 여름은 가장 덥고 겨울은 가장 추워 기후가 가장 극단적인 산지입니다. 편암이 곳곳에 드러난 메마른 땅으로, 운모 편암에서 비롯된 충적 자갈과 황토가 물빠짐이 좋고 열을 잘 머금습니다. 수확 직전까지 이어지는 큰 일교차가 한낮의 열기를 식혀 품종 개성이 선명하고 향이 풍부하며 짜임새가 섬세한 와인을 만듭니다. 피노 누아에서는 말린 타임 같은 허브 향과 스파이스가 생동감 있게 어우러집니다. 피노 누아 외에 피노 그리, 샤르도네, 소비뇽 블랑, 게뷔르츠트라미너, 리슬링도 재배합니다.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holar), 부르고뉴와인 마스터 프로그램,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캘리포니아와인전문가 과정 캡스톤(Capstone) 레벨1&2를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2018년부터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xelles) 심사위원,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펙사 코리아 한국소믈리에대회 심사위원도 역임했습니다. 독일 ProWein, 이탈리아 Vinitaly 등 다양한 와인 엑스포를 취재하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호주, 독일, 체코, 스위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