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을 부르는 대목이 가장 힘들었어요. 가족을 잃어버렸다는 편지를 읽고 노래하는데, 실제로 기차 안에서 아버지나 딸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제 가족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지만 우리 동포 이야기니까요.”(고려인 4세 배우 이사샤)
“저한테는 때로 지루하고 따분한 애증의 대상이던 우리 소리인데, 그분들에게는 아리랑 한 구절이 평생을 이어오는 힘이었겠구나 싶었어요.”(소리꾼·배우 전지원)
한 사람은 중앙아시아에서 나고 자라 한국말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한국 노래를 불렀고, 한 사람은 아홉 살 때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배우가 연극 ‘극장은 달린다’에서 만났다.
‘극장은 달린다’는 올해 공연계 신작 가운데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무대다. 1932년 연해주 신한촌에서 문을 연 고려극장은 1937년 스탈린 체제의 강제이주에 휩쓸려 중앙아시아로 옮겨간 뒤에도 94년째 명맥을 잇고 있다. 오세혁 작가와 변영진 연출이 의기투합해 이 실화를 무대로 옮겼다. 서울문화재단이 광복 81주년 특별기획으로 중앙아시아 순회를 위해 만든 작품이라 서울 정식 공연은 8월 13·14일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단 두 차례뿐이었다. 이어 고려인이 뿌리내린 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을 돌았다. 공연마다 이어진 호평 끝에 내년 초 재연도 일찌감치 확정됐다.
전지원과 이사샤는 이 작품을 끌고 가는 배우들이다. 전지원은 극 중 고려극장 여배우로 등장해 ‘춘향가’와 ‘심청가’ 대목을 부르며 고단한 강제이주사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타슈켄트 출신 고려인 4세 가수이자 배우인 이사샤는 한국말을 모르는 아기 엄마로 나온다. 우연히 본 고려극장 공연에 반해 단원이 되는 인물이다. 실제 고려인 후손이 고려인을 연기하며 현실과 무대의 경계를 허문다. 지난달 28일 서울 대학로 서울문화재단 연습실에서 두 배우를 만났다. 석 달여 전 단원들이 처음 모여 대본을 읽은 바로 그 자리다.
두 배우 모두 자신이 무슨 역할을 맡을지 모른 채 오디션에 뛰어들었다. 배역을 정하지 않고 ‘고려극장 단원’을 뽑는 공개 오디션에 약 500명이 몰렸다. 국악을 전공한 전지원에게는 처음 본 연극 오디션이기도 했다. 그는 “연기 오디션을 볼 자신이 없어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연기 레슨을 다섯 번 정도 받고 지원했다”고 했다. 소리꾼 지원자가 거의 없었던 만큼 “건빵에 별사탕처럼 한 번씩 소리를 하겠지” 싶었다고 한다. 이사샤는 옛 동기가 보내준 오디션 공고를 보고 도전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올해 2월 졸업한 뒤 맡은 첫 작품이다.
막상 첫 리딩에서 대본을 받아 든 두 사람은 덜컥 겁부터 났다. 배역도 음악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는 대본만 있어서 어떻게 작품을 완성할지 상상하기 어려웠어요. 노래도 찾아야 하고 안무도 해야 하고, ‘정말 열심히 달려야겠다’ 싶었죠.”(이사샤)
전지원도 장구와 사물놀이, 노래와 춤이 쉴 새 없이 등장하는 대본을 보며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더 큰 부담은 판소리였다. 그는 “고어도 많고 요즘 관객이 알아듣기 어려운데 판소리가 계속 나오면 지루해하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했다.
무대에서 능숙하게 악기를 다루던 다른 배우들도 처음부터 ‘액터뮤지션’은 아니었다. 상당수는 악기를 조금 다룰 줄 아는 정도였다. 길놀이 사물놀이도 처음에는 손이 따라가지 않아 느린 장단부터 맞췄다. 트럼펫은 음이 빗나가기 일쑤였다. 아코디언을 맡은 배우는 원래 피아노를 치던 사람으로, 누나에게 운지를 배우고 누나의 악기를 빌려 오디션을 봤다.
연습은 일주일에 하루만 쉬고 계속됐다. 초반에는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막판에는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연습실을 지켰다. 전지원이 꼽은 가장 힘든 장면은 춘향전을 공연하던 중 군인들이 들이닥치는 대목이다. 배우들은 옷을 던지고 짐을 싸서 곧장 대열을 지어 내달려야 한다. 옷걸이를 줄지어 세워 기찻간을 만든 것은 연출의 아이디어였다. 배우들은 옷걸이에서 옷을 빨리 빼는 연습만 한참을 했다. 전지원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먼지 때문에 계속 기침을 했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고 했다.
배우들 스스로도 작품이 어떤 모습이 될지 가늠하지 못했다. 확신을 준 것은 관객이었다. 서울 첫 공연 당일 낮 초청 관객 앞에서 연 오픈 리허설에서 이사샤는 “관객이 있어야 완성되는 작품이구나” 느꼈다고 회상했다. 웃기다 갑자기 슬픔으로 넘어가는 전환이 관객에게 통할지 걱정하던 전지원도 그날 눈앞에서 답을 봤다. 흩어졌던 단원들이 다시 모여 가족을 잃은 사연을 나누고 “우리가 우체국이자 극장이자 소식통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에서 관객과 배우가 함께 울었다.
“아, 관객이 이 에너지를 같이 따라와 주는구나, 우리가 끌고 갈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전지원)
서울 마지막 공연을 마친 다음 날 아침 8시 배우들은 인천공항에 모였다. 이후 세 나라에서는 도착하면 무대를 꾸리고 기술을 점검한 뒤 리허설과 공연을 마치고 다음 도시로 떠나는 일정이 되풀이됐다. 처음에는 음향팀과 의상팀 등 역할을 나눴지만 나중에는 배우와 스태프 할 것 없이 함께 짐을 나르고 무대를 세우고 철수했다.
“진짜 고려극장 단원이 된 것 같았어요. 유랑극단처럼 돌아다니면서 같이 무대를 만들고 공연하고 철수하니까 더 끈끈해졌죠.”(전지원)
관객 반응도 나라마다 달랐다. 비슈케크와 아스타나는 현지인 관객이 더 많았고, 한류와 K팝에 관심 있는 어린 여학생들이 객석을 채웠다. 현지 관객들은 서울 관객이 ‘쑥대머리’와 기차 안 몸싸움의 엇박자에 웃음을 터뜨린 장면에서는 조용했다. 대신 ‘카추샤’나 빅토르 최의 ‘혈액형’이 나오면 박수를 치며 따라 불렀다. 소비에트 당원이 선전극을 주문하는 장면에서도 폭소가 나왔다. 전지원은 “한국에서는 ‘선전극이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그곳 관객들은 다 겪은 일이라 많이 웃었다”고 했다.
가장 각별한 기억으로 남은 곳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였다. 다른 두 나라와 달리 객석 대부분이 고려인이었고 나이 든 관객도 많았다. “길놀이를 하며 객석으로 들어서는데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분들이 앉아 계셨어요. 우리가 정말 보여드리고 싶었던 분들이구나 싶었죠.”(전지원)
갈대밭에서 단장과 여배우 단둘이 남아 ‘심청전’을 하는 장면에서는 곳곳에서 울음이 터졌다. 두 사람이 추위와 굶주림에 쓰러진 뒤 ‘백만송이 장미’로 넘어가기 직전에는 박수가 쏟아졌다. “저희에게 보내는 박수이기도 했지만 잘 버텨낸 고려인들에게 보내는 박수처럼 느껴졌어요. 쓰러져 죽어가는 장면인데도 눈물이 계속 나더라고요.”(전지원)
이사샤에게 타슈켄트는 고향 무대였다. 그의 부모는 이날 처음으로 딸이 연극 무대에 선 모습을 봤다. 평소 칭찬에 인색하던 부모가 이번에는 “너무 재미있게 잘 봤다”고 했다. 이사샤의 친할머니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최근 사망증명서 같은 서류를 보다가 이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고려극장이 문을 연 무렵 태어난 할머니가 아기 때 강제이주를 겪었을 것이라고 했다. 조부모에게 들은 추위의 기억은 극 중 갈대밭 장면과 겹쳤다. 그는 “고려인 3·4세라면 대부분 너무 가난했고 먹을 게 없어 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부모나 조부모에게 들으며 자랐다”고 설명했다.
부모의 마음도 작품을 하며 뒤늦게 헤아렸다. 어린 이사샤는 한국어를 몰랐지만 부모는 “너는 한국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했고, 그는 뜻도 모르는 한국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려극장 단원을 연기하면서 부모님의 한국 문화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크셨는지 조금 알 것 같았어요. 저도 한국어를 몰랐지만 한국 문화를 알리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었거든요. 고려극장 이야기와 제 삶이 비슷한 점이 많았어요.”(이사샤)
전지원에게도 ‘극장은 달린다’는 자신이 해온 판소리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이집 시절 동요대회에서 한 심사위원이 부모에게 “이 아이는 국악을 해야 한다”고 권한 일로 소리와 인연을 맺었다. 오디션 때만 해도 자신이 그렇게 큰 역할을 맡을 줄은 몰랐다. 막상 갈대밭 장면과 후반부 비극을 끌고 가는 역할이 주어지자 “뭘 믿고 나한테 이런 막중한 역할을 줬을까” 싶어 두려웠다고 했다.
가장 두려운 장면이 바로 얼어붙은 벌판에 단장과 단둘이 남아 ‘심청전’을 하는 대목이었다. 추위를 실감 나게 표현하려고 냉수로 샤워한 뒤 에어컨을 18도로 낮춰 그 앞에 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추위만 표현하면 ‘냉동창고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슬픔에 빠지면 추위를 잊었다. 연출이 며칠 자리를 비운 날, 선배 배우들이 그 장면을 거듭 시켰다. “마지막에는 엉엉 울면서 했어요. 선배들이 그 감정이 있으면 거기서 조금 덜어내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평생 기억날 것 같아요.”(전지원)
그는 어려서부터 연기에 무게를 두다 보니 “소리꾼은 소리가 1번”이라는 꾸중을 들어왔다. 이번 무대에서는 박자를 조금 무시하고 소리가 흔들려도 연극적으로 허용됐는데 젊은 소리꾼에겐 짜릿한 해방감을 줬다. 한때 “소리 안 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판소리는 애증의 대상이었지만 이번 작품은 그 마음도 바꿔놓았다.
“옛날 사람들은 판소리를 들으면서 바로 알아듣고 ‘너무 재미있다’고 했잖아요. 지금도 그런 감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려면 판소리를 더 열심히 해야죠. 이게 제 무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전지원)
이사샤도 “제가 한국인인지 우즈베키스탄 사람인지 늘 정체성을 고민했는데 이번 공연을 하고 나서는 ‘나의 정체성은 고려인이다’, 그쪽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는 것보다, 동포들이 열심히 살아 지금 자리에 이른 과정이 자랑스럽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고려인은 불쌍하다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잘살고 있거든요. 젊은 세대도 고려인이라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라는 걸 다시 깨닫게 해준 연극이었어요.”(이사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