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 출판·저작자 단체 공동 발표…AI 활용 사실 공개·저작권 동의와 정당한 보상 원칙
이 책은 사람이 쓴 것일까, 인공지능(AI)이 쓴 것일까. 번역은 누가 했고, 표지와 삽화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을까. AI가 원고 작성부터 번역·편집·이미지 제작까지 출판의 여러 과정에 광범위하게 활용되면서 독자가 책을 고를 때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가’까지 살펴봐야 하는 시대가 됐다.
출판계가 최근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AI 활용의 투명성과 저작권 보호, 정당한 보상 등을 담은 자율 원칙을 마련했다. 핵심은 AI는 창작을 돕는 도구일 뿐, 책을 만드는 주체와 최종 책임자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출판인회의와 한국출판연구소, 한국작가회의 등 12개 출판·저작자 단체는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열린 ‘출판·AI 정책포럼’에서 ‘독자를 위한 출판사와 저작자의 AI 사용 원칙’을 발표했다.
이 원칙이 법적 구속력이 있는 규정은 아니지만, 관련 제도 정비에 앞서 출판계가 스스로 마련한 ‘현장의 약속’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출판사 설문조사와 전문가 검토 등을 거쳐 5장 20조로 구성됐다.
원칙에 따르면 출판물은 AI 산출물에 대한 인간의 통제와 검증 여부에 따라 ‘인간 저작물’, ‘AI 보조 저작물’, ‘AI 생성 출판물’ 등 3단계로 구분한다. AI 보조 저작물과 AI 생성 출판물은 독자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곳에 AI 활용 사실을 표시하도록 권고했다.
실제 출판 현장에서도 AI 활용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박정인 덕성여대 AI 다이나인포(DynaInfo) 연구소 교수가 국내 출판사 188곳을 대상으로 지난 7월 실시한 조사에서 9.6%는 생성형 AI를 적극 활용했고, 45.7%는 일부 업무에 활용하고 있었다. 20.7%는 시험적으로 도입했다. 반면에 생성형 AI가 주요 콘텐츠를 제작한 출판물을 한 종 이상 발행한 출판사는 20.7%였다. 박 교수는 “현재 출판산업에서 보조적 사용은 이미 일상화됐지만, 핵심 콘텐츠 생성은 아직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단계”라고 분석했다.
AI 활용 표시 기준에 대해서는 ‘본문의 상당 부분을 AI가 생성한 경우’라는 응답이 64.9%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AI 활용 고지와 분쟁 책임 조항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면서도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는 출판사가 66%에 달했다.
저작물의 AI 학습 이용도 중요한 쟁점이다. 원칙은 출판물이 AI 학습에 활용될 경우 권리자의 동의와 정당한 보상을 전제로 했다. 학습 데이터 이용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절차와 이용 목적에 따른 보상 기준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다.
저작자가 AI를 활용한 경우에는 활용 단계와 범위를 출판사에 알리고, AI가 제시한 정보의 사실관계와 타인의 권리 침해 가능성을 확인하도록 했다. 출판사 역시 저작자와 AI 활용 범위를 협의하고 관련 지침을 마련하도록 권고했다.
번역 현장에서는 AI 활용 여부를 독자가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홍한별 번역가는 “AI를 활용한 번역과 인간 번역을 구분해 독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번역가의 작업물이 AI 학습에 사용되지 않도록 표준계약서에 관련 조항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유통업계에서도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나왔다. 류영호 교보문고 부장은 “출판사는 AI 활용 및 검토 정보를 제공하고, 유통사는 이를 판매처에 전달하며, 서점은 독자에게 표시하고 문제 제기를 접수하는 등 공동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홍영완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은 “AI 기술을 배척하거나 AI 생성물에 주홍 글씨를 새기려는 것이 아니다”며 “출판과 AI가 공존하는 가운데 독자가 안심하고 책을 고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진근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행 법·제도적 틀은 기술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출판계가 자율적인 가이드라인과 출판윤리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원칙 발표에는 비평연대,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 청소년출판모임, 청소년출판협의회, 출판도시문화재단, 출판연구학교, 한국그림책출판협회, 한국어린이출판협의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출판연구소, 한국출판인회의, 한국출판협동조합 등 12개 단체가 참여했다.
한국출판인회의는 앞으로 AI 활용 표시와 계약, 권리정보 관리 등을 구체화하고 관련 법·제도 개선 논의도 이어갈 계획이다. AI가 출판의 창작과 유통 전반에 깊숙이 들어온 가운데, 이번 원칙이 현장의 구체적인 기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나아가 출판계가 AI 시대의 창작 주체성과 책임을 어디까지 제도화할 수 있을지 향후 논의의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