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국가 지도자들 가운데 좌파의 입장에서 가장 강력하게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과 대립각을 세워 온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가 실각 위기에 내몰렸다. 만약 조기 총선이 실시되고 거기서 우파가 집권에 성공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에겐 작은 정치적 승리로 기록될 전망이다.
2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스페인 하원은 이날 산체스 내각이 제출한 부동산 관련 법안 두 건을 모두 부결시켰다. 산체스 총리가 이끄는 사회당이 주도해 만든 이들 법안은 부동산 임대 시장에서 임차인들의 권익 보호를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표결 직후 야권에선 “산체스 연립정부의 완전한 실패”라며 “의회 과반 지지를 얻지 못한 산체스 총리는 물러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4년마다 실시되는 스페인 총선은 오는 2027년 7월로 예정돼 있다. 하지만 정부가 원내 과반 의원들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현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 총선을 실시해 의회 과반 다수가 지지하는 새 정부를 꾸리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 스페인 언론은 산체스 총리 등 연정에 참여 중인 주요 인사들이 주말 동안 의견을 모은 뒤 의회 해산 여부를 최종 결정할 것이란 관측을 내놓았다.
이번 부동산 관련 입법 논란은 80대 할머니가 임대료 급등으로 인해 강제 퇴거 조치를 당한 것에서 비롯했다. 마드리드의 한 아파트를 임차해 70년 넘게 살아온 마리 카르멘 아바스칼(87)은 갑자기 엄청나게 오른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다가 결국 집주인 측에 의해 쫓겨났다. 이에 성난 시민들이 강제 퇴거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에 나섰고, 정부를 향해 “임대료 인하”를 요구했다.
당황한 집주인 측은 할머니에게 임대료가 저렴한 다른 아파트를 빌려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대중의 분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가운데 정부는 신속히 임대료 인하를 유도하고 임차인 권익 보호를 강화할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산체스 정부가 내놓은 법안을 놓고 우파 정당들은 “정부의 부동산 시장 개입 시도가 주택 소유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임대 시장에 부동산을 내놓지 않게 만들 것”이라며 “그 결과 가격만 더 오를 것”이라고 반박했다. 일각에선 “주택 가격은 정부의 법령이 아니고 주택이 더 많아질수록 내려간다”며 주택 공급 확대를 촉구하기도 했다. 그간 산체스 정부를 옹호해 온 좌파 정당 의원 일부도 여기에 동참했다.
2018년부터 스페인 정부를 이끌고 있는 산체스 총리는 좌파 지도자들 중에서도 ‘강성’으로 통한다. 그는 우파 정권이 들어선 나라들이 펴는 반(反)이민 정책을 비난하며 외국인에게 스페인 국경을 활짝 개방했다. 어린이·청소년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중독을 우려하며 그 이용 제한을 추진해 미국 빅테크 기업들과 충돌했다.
외교적으로는 팔레스타인을 강력히 지지하며 이스라엘 규탄에 앞장섰다. 스페인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이지만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으로 올리라”는 트럼프의 요구를 거부했다. 미국이 이란 공격에 나선 뒤 산체스 총리는 미 군용기가 스페인 내 기지 등을 이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트럼프는 스페인을 가리켜 “형편없는 동맹”이라며 “모든 무역 거레를 끊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