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끝 아니다… 그러니 죽지 말라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 낸 김연수

이수지 그림책서 영감 얻어 집필 결심
좀 먹은 화폭 위 ‘눈 오는 풍경’ 떠올려

상처·상실도 세월 따라 새 의미 얻어
지금과 다른 ‘시점’ 있음을 알았으면
2027년엔 순교 다룬 장편 매듭 지을 것

2024년 7월 서울 종로구 서촌의 한 음식점. 소설가 김연수는 그림책 작가 이수지가 만든 그림책 ‘눈 내리는 삼일포’를 처음 봤다. 조선 후기 화가 현재 심사정(1707~1769)의 ‘고성삼일포도’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었다.

이수지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봤을 때 그림 속 푸른 호수 위로 흰 눈송이가 내리는 듯했다. 붓으로 그린 눈송이들이 아니었다. 시간이 그림에 좀이 슬게 했다. 구멍이 뚫린 자리에서 눈 내리는 풍경을 떠올려 이수지는 이를 한 권의 그림책으로 만들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눈은 점점 쌓여 마침내 화면 전체를 하얗게 덮는다.

일곱 번째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문학동네)를 펴낸 소설가 김연수가 5일 경기 고양 일산호수공원에서 포즈를 취했다. 30년째 일산에 살고 있는 그는 호수공원을 꾸준히 달려온 오랜 러너다. 최근 발을 다쳐 잠시 달리기를 멈춘 그는 겨울이면 다시 이 길을 뛸 계획이라고 했다. 고양=유희태 기자

5일 경기 고양 일산호수공원 인근에서 만난 김연수는 2년 전 여름, 서촌의 식사자리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수지씨가 그림책을 한 장씩 넘기며 보여줬어요. 보자마자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했죠. 망가져 가는 과정이, 그 망가진 흔적으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이야기였어요. 시간 때문에 훼손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 이야기에 끌렸어요.”



평소라면 집에 돌아가 이것이 소설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겠지만, 김연수는 그날 이수지가 책장을 다 넘기기도 전에 “이걸 소설로 써야겠다”고 충동적으로 말했다.

충동은 단편 ‘눈 내리는 삼일포’로 완성됐다. 이를 표제작으로 한 김연수의 일곱 번째 소설집(문학동네)이 최근 출간됐다. 2023년부터 올해 초까지 발표한 단편 아홉 편을 묶었다. 눈송이처럼 뚫린 표지의 타공 역시 이수지의 그림책과 닮아 있다.

심사정에게 닿기 위한 길잡이는 김연수가 오래전부터 즐겨 읽고 소설에 등장시키기도, 산문에 글을 인용하기도 한 실학자 이덕무(1741~1793)였다. 이덕무는 심사정의 삶과 예술에 대한 기록을 누구보다 자세히 남긴 인물이다. 김연수가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고, 어떻게 보면 운명적이었다”고 말한 이유다. “서얼이던 이덕무, 역적 집안 출신이던 심사정. 두 사람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았죠. 그런데 그 상처가 세월을 지나며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는 점이 맞물렸고요.”

시간이 훼손한 그림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시간의 작용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훼손과 상실, 불행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의미를 얻을 수 있다. 뒤에 일어난 일은 앞의 일을 새롭게 이해하게 만든다.

“망한 그림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새로운 의미가 생겼죠. 결국 시간을 통해 다시 살아난 거예요. 우리는 불행을 겪을 때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후대 사람들은 거기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저도 이 소설을 쓰고 위로를 받았어요.”

질병, 사고, 이별, 실패…. 불가피한 고통을 겪을 때 인간은 흔히 그 경험 자체보다 그 일을 해석하는 자신의 언어 때문에 더 괴롭다. 지금껏 살아온 경험에 입각해 고통을 평가하면 불행의 늪에서 헤어나올 방법이 없어진다.

아홉 편의 소설로 김연수는 제안한다. 긴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짧은 시간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다른 시점이 있다는 것 정도는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지금은 불행이라 부르는 일에도 어느 순간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수록작 ‘조금 뒤의 세계’에는 십 년 넘게 소설을 쓰지 못한 채 불면에 시달리는 소설가 ‘나’가 나온다. KTX에서 만난 한 여성은 ‘나’에게 “조금 뒤에 들릴 아기 울음소리를 미리 듣고 잠에서 깼다”고 말한다. 말이 되느냐고? 그녀는 “말이 되고 안 되고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소설은 그녀의 청소년기로 이어진다. 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를 피하기 위해 “예상할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려고 애를 썼”던 그녀는 현실 너머에 다른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걸 상상한다. 현실의 경험은 끔찍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일 리 없다고 믿는 의지를 인간이 발휘할 수 있음을 소설은 보여준다.

김연수는 우는 아기의 사진에서 “울고만 있지는 않은 표정”(‘조금 뒤의 세계’ 중)을 볼 수 있다고, 행복과 슬픔의 사사분면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는 대신 “모두를 말해야 인생에 대해 제대로 말하는”(수록작 ‘수면 위로’ 중) 것이라고 썼다. 책을 덮고 나면 현재를 사는 다른 시선을 얻게 된다. 지금의 상처와 상실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정해진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운명론의 노예가 아니라, 미래를 기준으로 현재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존재다.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 먼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결국 자신의 삶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역할도 여기에 닿아 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 삶의 이야기를 하나의 방식으로만 해석한다. 그래서 더 괴로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소설가는 같은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독자가 ‘이 이야기를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하고 느끼면, 자기 삶의 이야기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일은 현실에서 번번이 패배하면서도 문제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정신승리법’과 무엇이 다를까. 김연수는 그 표현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사소한 일로 너무 많은 고통을 받고 있기에 단순히 정신승리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어 오랜 동료인 소설가 김애란의 말을 인용했다. 한 대담에서 김애란이 ‘대상을 묘사할 때 현미경으로 보는 것과 망원경으로 보는 것 중 어느 쪽에 가까우냐’는 질문을 받자 “둘 다 필요하지만, 렌즈를 닦는 손수건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김연수는 “대상을 보는 작가들에게는 각자의 손수건이 있어서 더 잘 보려고 닦는다”며 “하지만 그 손수건이 더럽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누구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게 맞고 저건 틀렸다’고 말하지만, 결국 각자 언어의 방식으로 렌즈를 닦는 것”이라고 했다.

김연수는 이 책으로 “궁극적으로는 ‘죽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지금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닙니다. 소설이 ‘더 좋아질 겁니다’ 하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다만 지금과는 다른 시점이 있는데 내가 못 볼 뿐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죽지 말라고요.”

1993년 시로 등단한 지 33년, 이듬해 소설로 등단한 지는 32년이 흘렀다. 어느새 일곱 번째 소설집과 여덟 권의 장편소설을 펴낸 작가가 됐다. 그는 “앞으로는 장편 작업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내년에는 장편소설 ‘바다 쪽으로 세 걸음’(가제) 집필에 집중할 계획이다. 2009년과 2016년 일부를 연재했지만 아직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다. 20년 가까이 이어진 프로젝트인 탓에 팬들은 이 작품을 ‘김연수의 반려소설’로 부른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간 형제의 이야기로, 상인인 주인공의 형은 순교하는 신부가 된다.

그는 “순교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채 이 소설을 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죽음과 삶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선택했는데, 그 의문을 붙들고 오래 연구했다”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래서 그 소설을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30년 넘게 써 왔지만 그의 소설은 번번이 스스로를 갱신하며 오늘의 질문을 던진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장수와 다작’을 부탁하는 기자에게 김연수는 웃으며 “목표는 무병장수”라고 답했다. “어릴 때는 나이 드는 게 궁금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완고해지는지 지혜로워지는지 알고 싶었죠. 나이가 이만큼 들고 보니, 성격은 대학생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간에 대한 감각이 달라졌죠. 100년쯤 살 수 있다면 그 감각이 어떻게 변하는지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