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퇴직연금 시장에서 자금을 굴리는 방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554조8800억원으로 전 분기보다 8.9% 늘었다. 이 가운데 원리금 보장형이 아닌 실적 배당형 상품의 비중은 35.7%로, 전 분기보다 7.1%포인트 높아지며 처음으로 30%를 넘어섰다. 실적 배당형 적립금은 197조 7000억원으로 집계됐다. 다만 원리금 보장형이 여전히 60%대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금융당국은 수익률 제고와 가입자 보호를 함께 강조하고 있다.
실적 배당형 확대를 뒷받침한 것은 상장지수펀드(ETF)와 타깃데이트펀드(TDF)다. ETF는 개인의 직접투자를 넘어 퇴직연금의 주요 운용 수단으로 자리 잡았고, 가입자의 은퇴 시점에 맞춰 주식과 채권 투자 비중을 조절하는 TDF도 연금 자산 배분 수단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산운용사의 경쟁력도 상품을 얼마나 많이 내놓느냐를 넘어, 투자자의 생애주기에 맞춰 자산을 어떻게 배분하고 장기간 관리하느냐로 평가 기준이 옮겨가고 있다.
이렇게 운용 환경이 달라지면서 자산운용사들의 사업 전략도 바뀌고 있다. ETF에서 외형을 키우는 동시에 TDF와 채권 혼합형 상품 등 장기 자산관리 영역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자산운용도 최근 ETF 사업 확대와 함께 퇴직연금을 주요 성장축으로 삼아 관련 상품의 선택지와 운용 역량을 넓히고 있다.
이 같은 전략을 이끄는 김태우 하나운용 대표는 펀드 매니저와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로 30년 넘게 업계에 몸담았다. 1993년 하나은행에서 주식·채권 운용으로 금융업 경력을 시작해 2000년 미래에셋자산운용 주식운용팀장, 2004년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피델리티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한국 주식 투자부문 대표를 지냈다. 2016년 KTB자산운용(현 다올자산운용) 대표이사에 선임됐으며, 2023년10월 하나운용 초대 대표이사로 취임해 작년 10월 연임했다.
김 대표의 취임 후 회사의 외형과 수익성은 함께 개선됐다. 금융투자협회 자료를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운용자산(AUM)은 42조6284억원으로 1년 전보다 16.4% 늘었다. 취임 당시인 2023년 10월 31조원대와 비교하면 약 37.5% 증가한 규모다. ETF 설정액은 지난해 말 3조925억원에서 4조5927억원으로 48.5% 늘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89억원으로 29.8%, 당기순이익은 79억원으로 50.1% 각각 전년 동기 대비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26.4%에서 33.0%로 높아졌다.
김 대표가 퇴직연금 시장에서 내세우는 축은 TDF와 주식·채권 혼합형 상품이다. 하나운용은 2024년 9월 TDF 브랜드 ‘하나더넥스트’를 선보이고 현재 6개 시리즈를 운용하고 있다. 회사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운용 규모는 4744억원이다. 주식과 채권을 함께 편입해 자산을 배분하는 채권 혼합형 ETF 라인업도 확대하고 있다. 단기자금과 연금계좌 유휴자금 운용에 쓰이는 ‘1Q 머니마켓액티브 ETF’는 지난해 5월 순자산 1조원을 넘어섰다. 김 대표는 2030년까지 TDF 시장에서 국내 5위권 진입을 목표로 제시했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한 산업 구조의 변화는 그의 상품 전략에 반영됐다. 하나운용에 따르면 지난 4월 출시한 반도체 관련 ETF 2종의 합산 순자산은 6월 들어 5000억원을 넘어섰다. 지난 6월에는 현대자동차와 기아 등을 편입한 채권 혼합형 ETF를 내놓고 AI가 자동차와 로봇으로 확산되는 ‘피지컬 AI’에 주목했다. 지난해 9월에는 정부의 AI 산업 육성 흐름에 맞춰 ’1Q K소버린 AI ETF’를 상장했다. 김 대표는 AI를 인터넷 등장에 버금가는 산업혁명으로 평가하는 한편 피지컬 AI와 바이오를 장기 유망 분야로 꼽아 왔다.
김 대표의 전문성은 펀드 매니저 시절부터 쌓였다. 그는 2000년 미래에셋운용에서 개방형 공모 상품인 ‘디스커버리’ 주식형 펀드를 운용한 바 있다. 설정 후 2년여간 시장 수익률을 크게 웃도는 성과를 내며 당시 큰 주목을 받았었다. 피델리티운용에서는 한국 주식 투자부문 대표로 국내외 기관·개인투자자 자금과 노르웨이 국부펀드의 한국 주식 위탁 운용을 맡았다. 회사 측은 당시 운용 규모가 평균 약 20억달러, 최대 약 50억달러였다고 설명한다. 2016∼2022년 KTB운용 대표로 재직하며 펀드 수탁고를 약 두 배로 키웠다. 그는 시장 자체를 예측하기보다 기업의 장기가치와 리스크 관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투자 원칙이라고 밝혀왔다.
이 같은 운용 성과를 산업 생태계 지원으로 연결하는 시도도 있었다. 하나운용은 지난 5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와 발전기금 약정을 맺었다. 미국 우주·항공 기술기업에 투자하는 ‘1Q 미국 우주항공 테크 ETF’의 운용보수 일부를 재원으로 삼아 카이스트의 연구·개발(R&D)과 교육 인프라, 인재 양성을 지원하는 게 이 약정의 구조다. 이 ETF는 올해 아시아·태평양 금융 전문지 아시아애셋매니지먼트(AAM)의 ‘2026 ETF 어워드’에서 혁신 패시브 ETF로 선정됐다.
퇴직연금 관리를 둘러싼 이 같은 경쟁은 개별 회사 실적을 넘어 국민 대다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퇴직연금은 노후와 직결된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국민의 선택 폭이 넓어질 수 있다. 그동안 대형사 중심이던 TDF·ETF 시장에 후발주자가 가세하면서 상품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보수 경쟁도 촉진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운용도 작년 주요 지수형 ETF를 낮은 보수로 선보였다. 자산운용사가 저비용 분산투자 수단을 공급하고, 장기 성과를 투명하게 관리하는 것은 가입자의 노후자산 형성과 맞닿아 있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어떤 투자상품이든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만큼 수익률 제고와 가입자 보호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점은 과제로 남는다.
퇴직연금 550조원 시대에는 자산운용사가 국민의 노후자산을 어떻게 투자 배분하고 위험을 관리하느냐가 과거보다 중요해졌다. 다만 TDF 시장은 상위 5개 운용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형사 중심 구조로, 후발주자인 하나운용이 가시적 성과를 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ETF에서 다진 성장세를 장기 자산관리와 퇴직연금 시장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가 김 대표의 다음 과제로 꼽힌다.
김정훈 UN SDGs 협회 대표 unsdgs@gmail.com
*김 대표는 현재 유엔사회개발연구소(UNRISD) 선임 협력연구위원, 한국거래소(KRX) 공익대표 선임 사외이사, 금융감독원 옴부즈만, 유가증권(KOSPI )시장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